몽골 도착, 몽골 청년 바타를 만나다.
에디터 : 박규동

2011년 7월 1일 金  흐림 / 무림리-인천-울란바타르    

울란바타르행 몽골항공은 12:05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둘째 영민이 차에 짐을 실었다. 자전거 2대와 트레일러 2대를 각각 박스로 포장을 하여 짐은 4개이다. 트레일러 안에는 필요한 장비를 넣었다. 음식은 집된장과 김, 마른미역, 장아찌 약간뿐 식량은 울란바타르에서 조달하기로 하였다. 아내와 흰늑대 그리고 며느리 은주가 동행을 하였다. 운전은 영민이가 하였다.



8시 반에 인천공항에 도착. 잠시 후에 막내 창민이와 며느리 수연이, 최서방과 처제 그리고 첼로님과 권영학 코치가 배웅을 왔다.
휴대화물을 계량하니 총 104kg이다. 64kg이나 초과하여 화물운송비를 따로 48만 원(60kgX8000원)을 냈다. 화물을 부치고 나서 휴게실에서 배웅나온 사람들과 환담을 하고 차를 마셨다.
권영학 코치는 오래만에 만나 반가웠다. MTB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뿌리를 내릴 초창기에 권영학 코치의 활약이 컷었다. 선수로 여러 차례 우승을 하였고 해외 선발전에 나가 올림픽 출전권을 따 오는 등 선수로서의 역활을 다 하고도 내가 만들어 시작한 산악자전거학교의 책임강사로 후배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던 사람이다.  지금은 국가대표 코치를 하고 있으며 "오를레앙" 대표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영민이, 최서방, 흰늑대, 불근늑대, 처체, 첼로님, 권영학 코치

항공기가 13:30으로 지연출발을 한다고 하기에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두 돌아가고 아내와 나는 첼로님의 안내를 받으며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첼로님은 보딩 게이트 앞까지 가서 헤어졌다.
탑승을 한 후에도 항공기는 예고없이 3시간을 더 지체한 다음 17:30에 이륙하였다.




울란바타르 징기스칸공항에 도착한 것이 21:00이다.
화물을 찾아 대합실 한 켠에서 자전거와 트레일러를 조립하고 짐을 챙기고 나니 밤 11시.
처음가는 밤길을 헤치고 가기에는 역부족이라 공항 대합실 의자에서 밤을 새기로 하였다.
아내가 잘 때에는 내가 앉아서 보초를 서고 내가 잘 때에는 아내가 새고....... 하는 식으로 밤을 샌 것이다. 여행 첫 날 치고는 뜻밖이었다.

그렇게 몽골의 첫 밤을 맞았다.

*** 인천공항에서는 몽골화폐 투그릭을 환전할 수 없다. 취급하는 은행이 아예없는 것이다. 미국 달러로 교환하여 몽골에서 투그릭으로 환전하였다.
징기스칸공항에 환전소가 있다. 미국 달러뿐 아니라 한국 원화도 교환이 가능하다. 공항환전소는 규모가 작아서 1인당 200$만 환전할 수 있었다.
울란바타르 시내에는 공인 환전소가 많았다.

*** 징기스칸공항은 규모가 작았다. 그러나 2~3시간마다 도착하거나 출발하는 밤 항공편이 있어서 공항대합실을 잠그는 일은 없었다.
다만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았다. 2층에 편의점이 문을 열어서 물을 살 수 있었다. 라면이나 간식도 살 수 있다. 우리는 가져간 누릉지를 깨물어 먹고 물을 마시며 밤을 새웠다.


2011년 7월 2일  土   흐림   Namuun Hotel  /  징기스칸공항-울란바타르-시내관광

의자에 앉아 졸다보면 누워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가를 알게 된다.
졸면서도 간간이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 건 화장실 입구에서 자고있는 우리를 잘 봐 달라는 꼼수이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상냥하게 웃음으로 답하면서 우리의 처지를 상황으로부터 잘 지켜주었다. 길고 지루한 밤이었다.

울란바타르 공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프랑스 여인이었다.

동이트는 아침 6시즈음에 이쁘게 생긴 프랑스 아줌마가 말을 건넨다.
"어디서 왔느냐?"
"한국에서 왔다."
"자전거여행을 하느냐?"
"그렇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프랑스에서 왔는데 몽골이 엄청 재밌다."
"우리는 여기서 밤을 샜다."
"우리가 묵고있는 게스트하우스에 재미있는 친구들이 많다. 그리로 오면 좋겠다. 내가 미리 연락해 놓겠다. 전화번호를 알려줄게."
"고맙다! 아내와 상의해서 전화걸겠다."

제1호 천사 바타를 만나는 순간

그녀가 사라지고 얼마 있다가 준수하게 생긴 몽골청년이 내 앞에 나타났다. 대뜸 한국말을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바타라고 해요. 혹시 불편한 일이 있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받을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고마워요. 한국말을 잘 하는군요. 한국에서 일을 했나요?"
"네, 처음에는 산업연수생으로 갔다가 좋은 분들을 만나서 대학원공부까지 하고 왔습니다. 한국에서 받은 은혜가 많아서 어떻게든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서른한 살의 착한 몽골 청년 바타를 그렇게 만난 것이다.
우리에게 바람의 신이 보낸 제 1호 천사이다.

징기스칸 국제공항


공항도로



화력발전소와 울란바타르 시내


날이 밝자 우리는 아침도 먹지 못한 신세로 자전거를 타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울란바타르까지는 약 18km. 밋밋한 언덕이 출발과 동시에 나타났다. 바타가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갔지만 그냥 좋은 청년이려니 하고 잊어버리고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가기로 하였다.
공항도로는 좁고 어설펐다. 게다가 운전자들의 무지막지한 운행질서는 담대한 나도 겁을 먹을만큼 위험했다. 배 고픈 것도 잊고 교통상황에 익숙해지려고 느리게 느리게 공항도로를 달렸다.
울란바타르의 교통상황을 감 잡으려면 인내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도심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청년 바타가 자전거를 타고 마중을 나왔다. 놀랍고도 반가웠다. 그가 사는 동네에 조용한 호텔이 있다면서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한다. 도중에 한국식당에 들려서 아침도 먹었다. 바타의 정성스런 배려에 점점 신뢰가 쌓인다.
오늘이 토요일이니까 내일까지 바타는 자기가 우리의 시내관광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호텔은 하루에 미화 60$이다. 이틀을 예약하고 방에 들어가 우선 잠을 잤다. 오후 3시에 바타가 호텔로 오기로 하였다.



울란바타르는 역동적이었다.
바타는 제 시간에 왔고 아내와 나는 바타의 안내로 수흐바타르광장, 간단사원, 세븐써미트 장비점, 백화점과 재래시장을 구경하였다. 내일 저녁에 볼 전통예술공연의 표도 예매를 하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하나로마켓에도 들렸다. 내일은 식량과 연료 등을 구매해야 한다. 바타는 내가 궁금해 할만한 것은 미리 알아서 찾아주었다. 경제와 민주화에 관심이 많은 청년 바타와는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시장경제로 전환되면서 일부에서는 빈부의 격차를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이 몽골의 발전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떠돈다고도 하였다. 혼돈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바타같은 청년들이 있는한 몽골의 장래는 낙관적인 것이다. 세계 10대 자원보유국인데다가 바타처럼 교육열이 높은 젊은이들이 있는 것이 희망이 아니겠는가!
내가 예상하였던 것보다 울란바타르는 번창하였고 미래지향적이었다. 몽골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기도해야겠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하나로마트

서울정 앞에서



수흐바타르 광장

테무진, 징기스 칸 동상

세계역사에서 가장 큰 대륙을 차지하였던 지배자는 몽골 사람 징기스 칸이다.
유라시아대륙 대부분을 침략하여 거느린 전무후무한 전설같은 이야기다. 13세기였다. 몽골을 상징하는 수흐바타르광장 정부청사 건물에는 징기스 칸의 동상이 몽골인들의 자부심으로 앉아 있다. 지나가는 자전거여행자에게 무슨 역사가 눈에 들어 오겠냐마는 징기스 칸 이야기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미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동토와 사막으로 이뤄진 황무지 스텝에서 어찌 이런 영웅이 태어났는지 말이다.
나그네는 도무지 모르겠다.





저녁이 되어 물을 길러 가는 모습

몽골 민주화에 기여한 사람의 동상 앞에서

간단불교 사원

사막여행의 무사와 청년 바타를 위해 기도하였다.


*** 울란바타르에 있는 세븐써미트(nurka@activemongolia.com) 등산장비점에서는 EPI형 캠핑가스도 팔고있었다. 혹시나해서 우리는 가정용 부탄가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어댑터를 장치한  가스스토브를  갖고 갔었다.

*** 울라바타르에서는 등록된 택시를 찾기가 어렵다. 대신에 지나가는 아무 승용차나 손을 들고 세우면 선다. 그럼 그 승용차를 택시처럼 이용할 수 있다. 미터기가 없으니 미리 흥정을 해야 한다. 크고 작은 트럭도 같은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다.

*** 배낭을 등에 메고 거리를 다니다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권고를 받았다. 배낭을 등에 메고 다니면 물건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앞쪽으로 메고 다니라는 것이었다.

*** 간단불교사원에서는 입장료 외에 내부에서 사진촬영비를 따로 받았았다.



여행 후원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위의 기사는 개인적인 용도 및 비상업적인 용도의 '퍼가기'를 허용하며, 상업적인 용도의 발췌 및 사진 사용은 저작자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