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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이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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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 시(市) 또한 아프리카의 여는 도시와 마찬가지로 물 부족과 전기부족이 상습화 되어있다. 여관에 있는 동안 예고 없는 정전사태가 빈번하고 수도꼭지가 마르기 일쑤이다. 상습적인 정전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고 초연하기만 한 이곳의 사람들이 그저 존경스럽기만 하다. 어두운 거리와 골목을 꽉 메우며 다니고 있는 사람들 또한 어둠과 결코 분간이 되지 않는 어둠 그 자체가 되어 세상은 그야말로 암흑의 땅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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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화려한 빌딩들의 뒤 골목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와 같은 입장의 여행객들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발견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가는 곳마다 현지인의 부동의 타깃이 되며 수 많은 조준경 속에 걸려들어 나의 한 손짓 한 발걸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곳 케냐인들도 탄자니아 인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인상이지만 이들은 그나마 영어소통이 가능해 확실한 의사표시로 그들을 맞 무시 할 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이지만 이들의 중국인 무시 또한 노골적이고 뿌리가 깊다. 이곳에서도 역시 넌더리 나는 인간들이 나의 앞에 파리떼처럼 늘어서 있어 답답한 마음이다.
내가 있는 이 상가골목은 한 마디로 말해 '인간시장'으로 갖은 부류의 인간들이 다 모여있다. 시외터미널까지 합세해 이 곳에서의 하루는 숨막힐 정도로 정신 없이 돌아간다. 수 많은 행인들과 짐을 운반하는 대형 손수레가 어지럽게 교차하는 가운데 경적을 울려대며 골목을 무차별로 질주하는 시외버스들이 나의 혼을 뺀다. 이 어지러운 골목길의 곳곳에는 아침저녁으로 대형 고 볼륨의 스피커로 예수를 부르짖고 찬양하는 설교와 찬송가가 사람들의 귀를 뒤흔들고 그것도 모자라 자칭, 거리목사들이 성서를 흔들고 골목골목을 누비며 고래고래 예수를 부르짖는다.
거리 반대편의 모스크에서는 '알라'를 향한 부르짖음이 그들과 날카롭게 부딪치며 대치하고 있으며 일요일이 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신을 둘러싼 치열한 난타전으로 골목의 어느 한 구석도 평화롭게 안주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이 곳의 목사들은 정열적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는 물론, 찬송가까지 직접 큰 목소리로 불러가며 완벽하게 하루를 소화하고 있어 모든 이들을 감동시킨다. 아프리카의 교회에서 찬송은 제일 중요한 행사로 교회참석자들은 경쾌한 템포의 찬송가에 맞추어 신나게 흔들고 소리를 질러대 옆에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신이 날 지경이다.
이곳에는 또한 초 대형 힌두사원까지 있어 인도인들의 세력을 실감나게 한다.
탄자니아에서도 그랬지만 이곳 케냐에서도 오직 재팬(Japan) 뿐이고 토요타(Toyota) 뿐이다. 대형트럭을 제외하고 도로를 달리고 있는 차량의 98-99%가 토요타이고 나머지 1-2%가 미츠비시(Mitsubishi)나 마츠다(Mazda)인데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하는 것이, 차량의 거의 대부분이 한결같이 중고차이다. 새 차처럼 보이는 승용차들조차도 자세히 구석구석까지 들여다 보면 일본어로 적혀진 작은 스티커들이 어디선가 발견된다.
일본 땅을 상당시간 굴러다녔던, 그리고 폐기처분 된 중고차량들이 넓은 이 땅으로 보내져 이곳에서 그 최후를 맞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일본의 입장에선 최소한 일석이조의 즐거운 일이다. 어쨌거나 이 곳에서 '토요타(Toyota)'는 예수s, 그리고 알라와 동격이다.
케냐의 중심인 나이로비에 들어와 또 한 번 뒤통수를 얻어 맞는다. 길을 묻는 나에게 친절을 베푼 후, 당연한 듯 손을 내밀며 그 대가를 요구하는 사태가 젊은 친구와 중년사내로부터 연거푸 발생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로 돈을 대가로 한 환대란 환대가 결코 아닌, 사기 기만이기 때문이다.
국경관리의 파렴치함에 이어지는 이런 작태에 그저 우울함뿐이다.
나는 '아프리카1'의 스토리를 완결하기 위해 하루 종일 여관방에 쳐 박혀 페달을 밟는 대신 글자판을 두들겨댄다. 10여 일에 걸친 작업 끝에 스토리와 사진정리를 끝내고 인터넷카페를 찾으나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쉽지 않게 찾아 낸 인터넷카페조차 많지 않은 컴퓨터에 전송속도도 상당히 늦어 나의 글과 사진을 서울로 전송하는데 이틀을 소요했다. 이곳의 인터넷 이용자들은 모두가 사무나 사업용 서류를 준비한다거나 이 메일을 보내는 일 정도로, 이 곳이 한 나라의 수도임에도 이 곳의 사람들에게 컴퓨터는 아직도 결코 친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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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골목에 있는 이발소에서 150S(1불70센트 상당)을 주고 머리를 빡빡 깎는다. "아, 상쾌하다!"
글과 사진작업을 끝내자마자 바로 찾아 온 감기 몸살증세가 자꾸 나를 침대 위에 주저 앉히려 하지만 나는 결국 떠남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7월 2일, 아침에 일어나자 시작되는 복통에 기어코 나의 발목이 잡혀 오전 내내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있는다.
7월 3일, 고요한 일요일 아침이지만 나의 정신과 몸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어제 밤 나는 끝내 한 숨도 못 잤다. 어지러운 꿈들이 연이어 나를 덮치고 할퀴며 수면을 방해했고, 새벽 2시 반경에는 난데없이 적지 않은 수의 중국인 투숙객들이 들이닥쳐 여관의 안팎을 까뒤집으며 뒤흔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나의 수면의지는 형체도 없이 부서져 사라졌다.
아침 6시 반경, 3층에 이르는 적지 않은 수의 계단을 기다시피 내려와 텅 빈 도로 위에 선다. 땅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은 몸 상태이지만 나의 두 발은 어느 새 두 페달을 밟고 있고 나침반의 방향은 정확히 정북을 가리키고 있다. 속절없이 돌고 돌아가는 두 바퀴에 나는 그저 몸을 맡긴 채,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도로를 달리는 동안 인간똥파리들이 속출하며 그나마 남아 있는 나의 기력을 빼앗는다.
몸에 기력이 없어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연신 혀를 내밀고 달려가는 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마실 물을 달라는 멀쩡하게 차려 입은 도시청년, 그리고 환한 미소로 "Welcome to Kenya!"를 부르짖어,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Thank you!"로 답례하는 나를 기어코 쫓아와 "음료수를 사 달라!"며 두 손을 내밀고 생떼를 쓰는 10대 소년까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부터 이런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성이 겨우 가라앉은 나의 위장을 다시 뒤틀게 한다.
바이커에게 생명과도 같은 물을 주기는 커녕 달라고 나를 가로막는 그 청년은 도대체………
수면부족상태에서는 계속 먹어대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 비상용으로 사서 넣어 둔 비스킷을 도로에 선 채 계속 씹어대며 달린다. 카라티나(Karatina)를 10km정도 남겨 놓은 작은 마을인 키비고티(Kibigoti)에서 나의 한계가 왔다. 110여 km를 달렸다. 도로변에 있는 작은 약방 앞에 놓인 음료수 가판대에서 차가운 콜라를 단숨에 들이키며 동네를 둘러보니, 작은 마을이라 두 개의 여인숙뿐이다.
가까운 여인숙 앞에 멈추어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50 후반의 흉측한 인간똥파리가 나에게 달라붙는다. 그는, 주인을 기다리다 못해 또 다른 여인숙으로 향하는 나를 바짝 붙어 쫓으며 나를 안내하겠다며 억지를 쓴다.
"나는 너의 도움이 결코 필요 없다!"며 그를 뿌리치지만 이 땅의 인간똥파리들은 호주똥파리와 한치의 다름이 없는 사생결단에 '막가파(派)'이다.
호주똥파리들은 두들겨 맞아 전신이 박살이 나야 비로소 끝이 나지만, 이 곳의 인간 똥파리들은 그들의 손에 돈을 확실히 쥐어야만 비로소 떨어져 나간다.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에서 이런 똥파리가 달라붙어 깐죽대면 솔직한 심정으로 그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싶을 정도가 된다.
어이없게도 이들은 결코, 주면 주는 대로 받고 나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적으면 적다고 또 다시 달라붙어 나의 입에 개 거품을 물게 한다. 결국 그에게 30S를 주었으나 적다며 생떼를 부려 20S을 더 주고 그로부터 해방되었다.(50S이면 이 곳에서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작은 마을, 키비고티(Kibigoti)에서 머물렀던 200S(2불40상당)여관인데 밤새 두드려대는 음악과 취객들의 소음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이 여인숙 앞에서 달라붙은 한 인간똥파리가 기어코 50S을 받고서야 떨어졌다. |
200S(2불40)의 여인숙 방에 들어가 방문을 걸고 겨우 긴 한숨을 몰아 쉰다. 저녁 8시가 넘어 어두운 골목을 걸어 나와 식당을 찾는다. 한 줌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사람들로 아수라장이다.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나를 향한 불쾌한 환영을 무시하며 식당 같지 않은 식당에 들어서니, 한 중년의 사나이가 활짝 웃으며 나에게 환영의 악수를 청한다. 한 순간이나마 흐뭇한 마음으로 서 있는 나에게, 그는 또 한 번 나의 뒤통수를 후려 갈긴다. 나에게 음료수나 차를 한 잔 사라며 두 손을 천연덕스럽게 내밀고 서 있다!
"도대체 이 땅에는 XX놈들이 왜 이렇게도 많으냐?! 상대를 사람 취급은 커녕 원숭이 취급하며 무시하고 침 뱉는 놈들이 그 원숭이 앞에서 두 손을 내미는 것은 또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인가?!"
이 상태에서 욕을 할 수 없는 것조차 결코 바람직한 삶은 아닐 것으로 스님도 목사님도 신부님도 아닌 일개 무소속의 낭인(浪人)인 나의 삶에 다시 한 번 감사한다.
인간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 미소이고 웃음인데 나는 이제 그것을 결코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이 미소를 지을 때마다 나는 섬찟함과 함께 전신에 소름이 끼쳐 결국 상대를 외면하고 만다. 케냐인의 화사한 미소 뒤엔 가시와 독이 있다.
South Africa를 시작으로 짐바브웨, 잠비아, 탄자니아를 달려오는 동안 이 정도로 태연하고 뻔뻔스럽게 손을 내밀며 헌금을 강요하는 이들은 결코 없었다. 있었다 해도 한 잔 걸친 사람들의 투정수준이었다. 내가 이곳 사람들에게 듣기론 케냐가 짐바브웨와 잠비아, 그리고 탄자니아보다는 최소한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들었고,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의 규모 또한 다른 세 나라의 그것을 훌쩍 넘는다.
먹는 둥 마는 둥 불유쾌한 식사를 마치고 한 가게에 들러 1.5L짜리 물과 음료수 한 통을 산 뒤,골목 길을 이리저리 걷고 있던 중, 또 한 놈이 나의 옆에 바짝 붙는다. 20대 초반의 젊은 놈이다. 나는 쳐다보기도 싫어 그저 묵묵히 거칠기 짝이 없는 골목길 바닥을 내려다보고 걸으며 그에게 말을 던진다.
"너, 무슨 문제 있냐?!"
"으…음, 문제가 있지! 돈!"
순간, 나는 뭔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는 순간, 어둠 속에서 두 셋으로 추정되는 검은 물체가 또 가세를 하며 나를 가로 막는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골목 깊숙이까지 들어와 버린 것이다.
내 눈앞은 빛과는 완벽하게 격리 된 암흑지대로 사람들의 인기척조차 전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줄 곳 나의 옆에 바싹 붙어 따라오던 놈이 나의 몸에 들이 미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상대파악을 해보지만 어둠 속에서 이미 어둠이 되어 있는 그들을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저 어둠 속에서 무슨 색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천 쪼가리들이 꿈틀거리고 펄럭이는 것 하나만으로 사람의 존재를 인식할 뿐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허공인지…….
South Africa의 조하네스버어그(Johannesburg)에 처음 도착해 밤거리를 걸으며 놀란 것은, 어둠 속에서 나의 상대는 분명 나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지만 나는 상대파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번의 북반구 세계일주 동안 전기가 전혀 없는 네팔의 시골을 지날 때, 그곳의 현지인들은 비록 갈색피부에 가까웠지만 어둠 속에서도 대강의 윤곽은 잡혔다. 이 곳의 사람들은 입고 있는 옷조차 밝은 계통이 아닌 칙칙한 색이며 설사 밝은 색의 옷이라 할지라도 진흙과 흙먼지로 푹 절어 있어 빨아도 안 빨아도 똑같이 흙색이다.
검은 대륙의 지방도로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벌건 대낮에 이들은 아주 멀리서부터 나를 시종일관 바라보고 있지만 나는 나무그늘 아래 앉아 있는 이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결국 나는 작지만 아주 강력한 후래쉬를 장만하고 이제껏 밤에는 그것을 항상 목에 걸고 다녔으나 오늘밤에는 그것을 소지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독한 살 냄새가 나의 전신을 심각하게 흔들 즈음, 뜻하지 않은 불빛이 암흑 속에 큰 오점이 되어 반짝인다. 길모퉁이에 있는 집에서 한 아저씨가 백열전등을 키며 문을 열고 나와 큰 제스처로 가래침을 뱉는가 싶더니 문 앞에서 그의 발에 채였던 플라스틱 음료수병을 두 발로 요란하게 짓이기고 냅다 차버렸는데 묘하게도 우리들 발 앞에 굴러 떨어진다.
"아저씨, 내가 나의 여관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길을 잃어버렸지 뭐예요?! 이 근방의 여관이란 그 집 하나뿐인데………"
그는 그의 두 손을 뻗어 여관이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나에게 명쾌한 길 설명을 덧붙인다. 말의 고마움, 소통의 고마움이여!
나는 어둠과 '어둠의 자식들'을 향해 "Good-bye!"를 내 뱉으며 나에게 방긋방긋 손을 흔들고 있는 불빛들을 향해 유유히 걸어간다.
터덜터덜 여관방으로 돌아 왔으나 여관에 붙어 있는 바에는 취객들로 바글바글하고 고성으로 울려대는 음악소리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여관방의 문을 아무리 힘을 주어 고쳐 닫아도 건물자체가 엉성해 음악소리는 어떤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나의 전신을 들볶는다. 밤12시가 넘도록 두들겨대는 음악소리와 취객들의 아우성소리는 나의 심각한 수면욕구를 냉혹하게 무시하며 계속되고 나는 끝내 또 다른 불면의 밤을 맞이하고 만다.
결국, 결코 달갑지 않은 아침이 찾아 와 두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죽은 듯이 누워있는 나를 부르며 방문을 잡아 흔든다. 어쨌거나 아침이 되었으니 길에서 쓰러지던 말던 나의 일터, 도로로 출근을 해야 한다. 돈을 벌기는커녕 도로 위에 돈을 뿌리고 다닐망정…
나의 영혼은 내 몸에서 이미 다 빠져나가고 바람에 밀려 굴러가는 떨어진 낙엽처럼 그렇게 구르고 구르며 60여km를 달려 도착한 노로모루(Noromoru)의 한 여인숙에서 일찌감치 하루를 끝낸다. 두통과 기침이 계속되고 양 어금니가 아파 제대로 씹지를 못해 부드러운 것만 먹어대니 기력이 없어 식은 땀만 쏟아지고 나의 강력한 위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안팎으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지난 밤, 가까스로 몇 시간의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오늘은 두 말 필요 없이 105km를 달려 이시올로(Isiolo)시(市)에 도착해야 한다. 그 사이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지대이기 때문이다. 조그만 비스킷 5개를 사서 가방에 넣었다.
연신 긴 심호흡을 토해내고 틈틈이 도로변에 선 채 비스킷을 씹어가며 상습적인 문구인 젖 먹던 힘까지 빡빡 긁어내며 달리지만 이제껏 철근이었던 나의 무릎까지 아프기 시작한다.
기어코 105km를 달려 흙먼지 자욱한 이시올로 시(市)에 들어선다. 나이로비 시(市)에서 불과 276km 떨어진 이 곳이지만 삭막하기 짝이 없고 이 곳의 인간들은 거칠기 짝이 없다. 여인숙을 잡아 자전거를 들여놓고 밖으로 나와 거리를 어슬렁대는 동안 노소 불문한 인간 똥파리들이 줄지어 나에게 달려드는데 이들의 표정은 값싼 미소조차 흘리지 않으며 도전적이다.
어떤 놈은 "이곳에 왔으면 폼 잡고 거리를 활보하지 말고 여관방에 쳐 박혀 있으라!"며 적대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달라붙는 인간똥파리들을 단호하게 밀어내며 거리를 한 바퀴 돌아 한 식당에서 식사를 끝내고 여관으로 돌아 와 그대로 침대위로 무너진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우며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멍하니 있다가 나는 자전거 수리를 하기 위해 짐을 풀기 시작한다. 이미 오래 전에 뒷바퀴의 바퀴살이 하나, 또 하나, 그리고 어제 세 번째로 부러져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수리를 마무리 짓고 밖으로 나가 식당으로 향하다가 마사이족 출신의 한 청년을 만난다.
이칼라(Ikalla)라는 이 친구는 언젠가 한국 MBC방송국의 기자들이 이 지역을 취재하기 위해 왔을 때 그들의 가이드로 일했던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서 뜻밖의 청천벽력 같은 정보를 입수한다.
이곳에서 이디오피아의 국경, 모얄레(Moyale)시(市)까지의 526km의 도로 중, 약 100km의 도로를 제외한 430km의 도로가 대단히 험악한 비포장도로라고 한다. 이 도로는 지도상에도 이디오피아로 연결되는 유일한 국도로 굵은 선이 그어져 있다. 또 한 명의 트럭운전사에게 묻지만 똑 같은 대답이다. 내가 이미 탄자니아에서 522km의 비포장도로를 걷다시피 달렸던 악몽이 나의 머리 속에 너무도 생생하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이제 비포장도로는 더 이상 자신이 없어!"
선택은 단 하나뿐으로 하루에 단 한 번 심야에 이곳을 지나가는 버스를 타는 것이다.
국경인 '모얄레'까지 530km를 15시간 동안 달린다고 한다. 여관방에 돌아 와 선택의 기로에 선 채 우왕좌왕하며 침대 위를 뒹군다.
물동이를 잔뜩 짊어진 당나귀들. 작은 덩치에 짧은 다리임에도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당나귀의 슬픈 운명. 그래서 그런지 당나귀의 울음은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처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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