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비아, 내가 니 아이를 낳아줄께!
에디터 : 이호선

루사카를 지나고 변변한 타운 없는 깡촌의 시골길을 달리고 있지만 도로변을 걷고 숲 속의 초가집에서 나를 발견하고 노소남녀 구별 없이 아우성쳐대는 이 곳의 사람들은 전혀 어색함이 없이 영어를 말하고 있다. 문법에 틀리지 않는 정확한 영어를 말하고 있느냐는 둘째 문제로 자신이 배운 만큼의 영어를 주저 없이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대학생들은 거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으며 아줌마나 아저씨들도 자연스럽게 영어를 말하고 있어 나를 소스라치게 만든다.
내가 이미 지나 온 사우스아프리카(South Africa)나 짐바브웨, 그리고 이 곳 잠비아 사람들 모두가 자나깨나 말하고 있는 언어는 분명, 영어가 아니고 아프리카의 토족 어인 '스와힐리(Swahili)'다. 사우스아프리카의 백인들에게조차 흑인들의 아프리카 토족어가 자신들의 언어이다. 사우스아프리카만 하더라도 11개 정도의 아프리카 토족어가 존재하며 그 중 특별하게 많이 이해하고 말하는 사람이 5, 6개 정도이며 보통 2, 3개를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한다.
내가 사우스아프리카의 베라베라(Bela Bela)에서 만났던 네 사나이- 숀(Shaun), 찰스(Charles), 스프링(Spring), 그리고 피터(Pieter)-가 술에 푹 절은 상태에서도 줄기차게 씹고 뱉어내고 있던 언어는 오로지 아프리카 토족어 하나였다. 어쨌거나 이 곳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가 아닌 스페인어 일변도의 중남미대륙의 아미고(Amigo)들과는 딴 판으로 자신들의 고유언어를 지키며 말하고 있지만 세계 공용어인 영어 또한 능청스럽게 잘하고 있다.


이들은 초등학교부터 줄곧 영어를 교육받지만 그 어떤 특별한 '시청각교재'나 '사설회화학원', 그리고 '어학연수'의 낱말조차 이들의 사전(辭典)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시골 대부분의 지역에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T.V는 커녕 라디오조차 없다.
네가 오래 전 지나 온 네팔에서도 전기조차 없어 촛불과 호롱불로 살아가고 있지만 중고생들의 영어구사력은 나를 뒤로 넘어가게 했다. 우리 대한민국은 이들보다 한 술 더 떠 유치원에 가기 전부터 난리를 치며 영어를 가르친다. 꿈이나 생시나 영어에 이를 갈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온 몸을 부르르 떨어가며 대학교 대학원까지 졸업한 우리들의 영어구사력은???!
우리들은 이 곳의 사람들이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토익(Toeic)점수에 광분하며 살고 있지만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조차 시원스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들 이외의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주장하는 일에는 속수무책이다.

이런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처구니없는 수준을 넘어 "시일야방송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다시 한 번 부르짖어야 할 지경이다. 말이란 사람을 마주하고 대화하기 위한 것이지 사람 아닌 종이 앞에 앉은 채, 보고 머리만 굴리는 '침묵의 대화'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유사이래 최근까지 일관한 사회 미덕, '무언(無言)의 대화', '침묵의 진심'이란 인왕산을 비롯한 몇 몇 유명 산에서 일편단심 도를 닦고 계신 극소수의 비범한 분들을 위한 것 일뿐으로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오로지 '유언(有言)의 대화', '말, 대화의 진심'이 심각하게 요구된다.
이제껏, 신앙의 한 커먼센스(Common Sense)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한국의 많은 선교(宣敎)사업가들이 이 검은 대륙에 몰려왔다고 하지만, 이제는 이 검은 대륙의 사람들이 이 시대 또 하나의 심각한 커먼센스(Common Sense)인 '영어 소통력'을 우리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선영(宣英)' 사업차 대한민국으로 몰려 올 차례이다.
아프리카대륙은 이미 교회 포화상태다. 시골구석구석까지 민가 10여 채정도의 마을이면 어김없이 한 두 개의 교회가 있다. 아프리카대륙은 일년 365일 찬양과 찬송이 계속되고 있는 신이 넘쳐 흐르는 땅이 된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 선교사를 보내기보다는 정부의 영어교육담당관들을 연수 차 파견해야 바람직할 것 같다.
폐쇄적이고 방어일변도의 한글사랑이 아닌, 말 그대로 글로벌하고 오픈 된 상태에서의 적극적인 한글사랑이 바람직한 것이다. 오로지 한글만을 사용한다고 한글사랑이 아니다. 영어뿐만 아니고 우리주변국의 말들까지 소화할 수 있는 가운데 우리의 한글을 지키고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좀더 공격적이고 대담한 한글사랑이 필요 할 때이다. 대화 중, 영어나 다른 외국 말을 읊으면 아직도 한국의 많은 이들이 "건방 떨고 있네!", "꼴갑 하고 있네!", "육갑을 떨어라!" 등등 조선시대 척화비를 세우던 시절의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세계가 있기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나만 있고 우리만 있다면 결국 나도 우리도 결코 없다. 유난스레 자존심을 내세우는 사람이나 나라들은 실제로는 자존심이 될만한 자존심을 결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자신의 목에 매달린 갓난애에게 젖을 먹이고 있던 미모의 과일노점상 사장님은 나를 보자
다짜고짜 나의 팔을 잡아 끌며 나에게 속삭인다.
"지금 당장 우리 하나 만들자!"
"?%*#$^! 도대체 무시기를??"
"내가 니 새끼 하나 낳아 준다니까!"

루사카(Lusaka)를 지나면서부터 눈부신 도로가 계속된다. 포장된 느긋한 갓길이 있어 지나치는 차량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내 갈 길만 가면 된다. 도로변에는 짐바브웨에서보다 더욱 큰 규모의 과일 노점상이 심심찮게 등장하며 나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카브웨(Kabwe)시를 지나 작은 마을인 리테타(Liteta)를 지나가다 도로변의 과일 노점상 앞에 정지해 토마토 3개를 먹고 있자니, 옆에 앉아 있던 세 아저씨- 이 마을의 이장(里長)급으로 보이는 커비(Kirby)씨, 마욘(Mayon)씨, 그리고 카손(Kason)씨-가 연신 나에게 질문을 해댄다.
결국 나의 모든 이력이 백일 하(白日下)에 드러난 채, 그들은 경탄과 감동의 끄덕임을 계속하던 끝에 나에게 수박 한 통을 산다. 이는 분명 충격에 해당하는 대단한 환영이고 호의다. 세 분의 마음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결코 작지 않은 배(胃)만큼이나 넉넉하고 풍요롭다.
그들은 마을 대표답게 자신들의 마을자랑을 서슴지 않는다. 수박 한 통을 깔끔하게 해결한 뒤, 잔뜩 부풀어 오른 나의 배를 그들과 당당하게 견주며 두들겨 대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세 아저씨들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태양의 열기 속으로 뛰어든다.

연일 숲 속을 내 집 삼아 북 동진을 거듭하고 있지만, 숲 속에 들어가 모기가 차가운 바람에 완전히 기를 못 펴게 되는 약 2시간 가량은 긴장을 안 할 수 없다. 나는 이미 말라리아 위험지대에 들어 와 있기 때문이다. 이 곳의 도로변과 숲 속에는 많은 이들이 자전거나 도보로 밤 늦게까지 왕래하고 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키가 큰 억새풀밭과 나무 숲 속 깊숙이 들어가 텐트를 칠 수 밖에 없어 모기들을 피할 수 없다.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급강하하는 덕을 톡톡히 보고는 있지만 조금이라도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대부분이 작은 모기이나 종종 유별나게 큰 위를 가진 흉측한 모기가 덤벼드는데 이것이 바로 말라리아 모기인 듯하다. 찬바람이 불어 기온이 제대로 떨어지기까지의 2 시간 동안 나는 차라리 홀랑 벗고 운동을 하기로 한다. 앵앵대며 내 주위를 맴도는 모기들을 무시하고 몸을 움직이면 그것들이 달라붙지는 않는다.
1시간가량 운동을 하고 찬물로 퀵샤워를 하고 나면 모기들이 서서히 어딘가 따뜻한 곳으로 짱 박힐 시간이 돼 버린다. 어쨌거나 매일 밤 모기들에게 대여섯 방은 예외 없이 물리고 있다.

억새풀밭과 나무 숲이 한결같이 이어지고 도로변이나 마을의 진흙 땅은 바싹바싹 말라있다. 집에 펌프나 우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은 상당거리 떨어져 있는 공동 우물 터나 펌프장에서 물을 길어와야 하기에 도로변에는 물을 채운 플라스틱 통을 자전거에 싣거나 머리에 인 긴 행렬이 목격된다. 도로변의 가게에 들어가도 파는 물을 제외하곤 물이 결코 존재하지 않아 세수한 번 하기도 쉽지 않은데 무엇보다 빨래가 문제다.
대단히 맑은 물줄기가 도로변의 숲 속 한 가운데를 가르며 흐르고 있어 자전거를 세운 후, 빨래 감을 들고 달려 내려간다. 물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해 머리를 감고 빨래를 한다. 빨래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삐거덕 소리를 내며 자전거 한 대가 엘파마의 옆에 서는가 싶더니 20대 중반의 한 건장한 청년이 천천히 나를 향해 언덕을 걸어 내려온다.
내가 빨래의 뒤처리를 하며 다시 한번 앉은 채로 뒤돌아 그의 대강을 훑어보는 순간, 그는 전혀 독해하기 어려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의 오른 손에 한 손 가득 각이 진 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물을 짜내고 있던 빨래 감을 물가에 심어져 있는 넓은 돌 위에 던져 놓으며 빠른 동작으로 일어서 몸을 뒤로 돌리는 순간, 그는 자신이 신고 있던 낡은 슬리퍼마저 모래 위에 벗어 던진다.
'지난 1 년간 무사고 운행을 해 왔는데 결국 오늘 잠비아 땅에서 사고를 치게 되는군! 나의 오른 손은 그렇다고 쳐도 나의 왼손 주먹만큼은 아직 완벽하게 살아있어. 지난 1년 동안 숲 속에서, 그리고 여관방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담금질하며 날 세워 잘 갈아 놓았거든!'
마침내 그가 나를 향해 달려들 듯 다가옴과 동시에 이미 상대표적의 파악을 끝낸 나의 왼손주먹이 발사되려는 순간, 그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나의 옆으로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며 물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뭐야?!!"
그는 무릎 위까지 물속에 푹 담근 채 물가의 돌에 철버덕 앉자마자 그가 오른 손에 야무지게 쥐고 있던 작지 않은 사각형의 돌로 그의 발꿈치를 신나게 긁어대기 시작한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네!
나의 뒤통수를 깨뜨릴 흉기로 알았던 그 돌은 다름아닌, 발뒤꿈치에 몇 겹으로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는 두터운 피부각질 제거용의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거의 맨발로 다니고 있기에 그 부분이 아주 두텁다.
그의 심각한 맷돌질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잔뜩 벌어져 결코 닫힐 줄 모르는 그의 입을 타고 알 수 없는 노래까지 흘러 나온다.
"휴-우, 하마터면 오인사격으로 큰 사고 칠 뻔했네!"


도로를 달리면서 나를 질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다. 도로변에는 변변한 마을도 없이 서너 채의 집들이 띄엄띄엄 계속되고 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와 행인의 발길이 결코 끊김이 없다.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인 밴의 운행조차도 뜸해지며 사람들은 일 이십 리 길을 당연한 듯 걸어 다닌다. 하루 10여 시간 주행을 하는 동안 도로변 행인들 뿐 아니라 도로변의 가게, 도로 안쪽에 있는 초가의 사람들까지 나에게 확실한 답례를 요구하는 환영의 아우성소리가, 호주에서 나를 진저리 치게 했던 쉼 없는 파리들의 웅웅소리처럼 나를 질리게 한다.
수도 없이 나를 향해 던져지는 "How are you?!"에 일일이 응답하고 손을 흔들 수는 없어 무시하고 지나치면 그들의 "How are you?!"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집에서 도로까지 뛰어 나오고 나를 쫓기까지 하며 "How are you?!"를 연발하는 이들의 환영에, 나의 입에서 신물이 나올 정도다.
엘파마(Elfama)는 어떤 삐거덕 거림도 없이 조용히 달려가지만 주위사람들에게 번번이 들켜 무차별한 환영인사를 뒤집어 써야 한다. 도로변에서 수십m내지 100여m까지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숲 속의 민가이지만 그들은 살금살금 숨 죽이며 지나가는 우리를 귀신같이 포착하고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How are you?!"를 부르짖는다. 그들의 모든 촉각안테나는 집밖과 도로를 향해 집중되어있다.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려가는 사람들이나 도로를 걷고 있는 보행자들 또한 한결같이 똑 같은 기묘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나의 앞을 걸어가는 행인들이나 동네 바이커들 모두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수시로 뒤를 돌아보거나 두리번거리며 걷거나 달려간다. 정말 해괴한 이들의 습관인데, 도대체 이들은 왜?????!
누군가가 그들의 뒤통수를 후려칠까 걱정이 되어서?!  방금 지나쳐 온 과거가 못내 아쉬워서?!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며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것일까?! 결국 그들은 내가 그들의 존재를 감지하기도 전에 수 차례에 걸친 뒤돌아봄으로 나의 등장을 미리 확인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 검은 대륙은 이미 신의 은혜로 넘쳐흐르고 있는 축복의 땅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정작 이 땅의 사람들이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두 손에 움켜쥐고 있어야 할 '나(我)'가 안 보이고, 분명 이름 다르고 사람 다른 그들의 삶의 모습은 싫증날 정도로 한결같다.
하루 종일 밖을 내다보고 도로를 응시하고, 또 뒤를 돌아보고 두리번대면서 '나'의 무시, 끝내는 '나'의 포기를 선언한 채 내가 삭제된 '우리'와 '모두' 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노래하고 마시며 떠든다. 오전부터 대형 확성기를 통해 무차별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가 모두의 귀를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동네의 바(Bar), Bottle shop 앞에 노소 관계없이 파리떼들처럼 까맣게 달라붙어 빨아대고 떠들고 두리번거린다. 정오도 안된 시각이지만 이미 비틀어지고 꼬부라지고 돌아가 버린 그들이 넋두리처럼 읊어대는 God과 Jesus 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오후가 되고 해질 무렵이 되면 꼭지가 돌아가 버린 이들이 속출하며 자칫 험악한 사태가 되기도 한다. 나 또한 목이 마르고 음식 고프기에 메마른 목을 적시고 배를 채우기 위해 파리떼처럼 새까맣게 몰려 있는 이들의 무리 속을 뚫고 가게로 가는 동안, 종종 Jesus를 부르짖으며 나에게 '베풀음'을 집요하게 강요하고 깐죽대는 친구들이 있어 나를 곤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중남미나 아프리카의 시골은 한결같이 음주와 무차별풍악으로 어지럽고 중국의 시골은 조용하나 도박으로 어지럽다. 그래도 이곳의 시골사람들은 순진한 편이다. 종종 도박도 득도의 길이라고 박박 우겨대는 진상들도 적지 않지만, 정말 그렇다면 입산수도하고 있는 스님들의 삶은 개똥이 된다.

"신의 은혜로 넘쳐흐르는 이 땅의 그대들에게 이제부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어딘가에 빠트려 잃어버린 그대들의 '나(我)'를 찾고 그대들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일세. '나(我)'가 없으면 사랑하는 나의 가족도 이 세상도 이 우주도, 그리고 그대들의 신(神), Jesus도 없다네! 언제까지 뒤돌아보고 두리번거리며 걸으려 하는 것이냐?! 앞 만보고 걸어도 우리 앞의 갈 길이 멀고 멀다!"

우리들의 삶은 또 어떤가?! 결코 뒤돌아 보지 않고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치열하게 살아 온 나의 인생이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으로 여겨질 때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우리'들과 함께 남발되고 있는 수많은 이름과 명분의 부르짖음 속에 건배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천하를 다 움켜쥔 듯 큰소리치고 온 몸에 힘주고 있다가 세상과 격리 된 화장실에 홀로 들어와, 갑자기 머리 속이 뻥 뚫려버린 듯한 고요 속에 문득 세면대 벽에 붙어 있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도대체 뭐냐, 그리고 너의 삶은??!"이라는 심각한 질문이 튀어 나오기 시작한다면?!
'나(我)'를 외면하고 무시했던 삶의 최후가 온 것이다! 우리들 중, 적지 않은 이들에게 이미 그 최후가 와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친구들과의 우정과 의리를 빙자해 '위하여'를 부르짖고 잔을 부딪으며 '나'자신에 사기치고 '나'를 무시하고 포기하며 끝내 '나'로부터 도망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산다는 것이 뭐 별거야?!! 이렇게 남들처럼 살다가 남들처럼 가는 거지! 흐흐흐 히히히!"해괴망측한 웃음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을 뽀개 듯 박차고 튀어나와,
"아줌마, 여기 안주하고 쐬주 댓 병 좌-악! 말 안 해도 잘 알잖아?!!
인생이 뭐 별거야!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

항간에 떠도는 '무자식 상팔자'의 속설은 이곳 검은 대륙에서는 일말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다.
이들이 없다면 식당과 가사일을 전담해야 하는 엄마가 며칠을 버티다 구급차에 실려가겠는가?!
이들은 쿵후의 갖은 권법을 리얼하게 나에게 선보이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T.V조차도 없는 판국에 쿵후 비디오를 어디서 봤는지 나에겐 미스터리일 뿐이다.

도로를 달리면서 나를 또 감동시키는 것이 이 곳 아이들의 숫자이다. 집은 분명 한 두 채에 불과하나 진흙바닥의 뜰에서 맨발로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의 숫자는 최소 분대병력이다.
세렌제(Serenje)를 지나 임피카(Mpika)를 향해 페달 질을 재촉하던 중, 철로 변에 있는 작은 식당 앞에 자전거를 세우나 시간이 너무 일러 아무것도 준비되어있지 않다. 결국 나는 주인아줌마에게 달걀 10개를 삶아달라고 부탁을 한 뒤, 집의 뒤뜰로 들어가 보니 마당엔 아이들로 버글버글하다. 총원이 7,8명 정도인데 각자 자신들의 임무가 부여 된 채, 엄마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一事紛亂)하게 움직이고 있다. 식당의 홀을 청소하고 세팅을 하고 있는 큰 딸, 마당구석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긷고 설거지와 빨래 등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작은 딸들, 그리고 마당에서 지붕보수를 위한 나무널빤지를 지붕으로 올리고 있는 큰 아들과 지붕에 올라 가 이 나무들을 받고 있는 둘째 아들. 모두 10세를 전후한 아이들이지만 한결같이 집안일을 책임지는 중요한 일꾼들이다.
"자식 낳아보았자 다 소용없어!"
"아녀, 아녀! 그렇지 않당케! 낳아 놓기만 하면 쓸모 없는 놈은 하나도 없어! '무자식 상팔자'가 아니고 '유자식(有子息) 상팔자'라니께!"

잠비아의 변방으로 달리면 달릴수록 주위는 더욱 더 황폐하고 메말라 간다.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들은 찢어진 옷에 흙으로 뒤범벅이 되어 사람도 옷도 흙이다. 공조차 없어 비닐과 헝겊을 둥글게 뭉치고 끈으로 감아 공 삼아 차고 다닌다. 도로변에 나타나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가게 주위엔 청년, 아저씨뿐만 아니고 아줌마들까지 아침부터 술을 들이키고 있다. 시골의 주막집에서는 대형 플라스틱의 술독에서 술을 되로 팔고 있는데 잠비안 비어(Zambian Beer)라고 부르고 있는 이 술은 다름아닌 옥수수 막걸리로 우리의 막걸리처럼 걸쭉하지 않고 약간 정제한, 우리의 '약주'수준의 술이다. 그들은 나의 등장(登場)에, 나를 그들에게 양식과 술을 베풀어 주는 예수의 사도 내지는 구세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며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나는 그저 그대들을 스쳐 지나가는 외로운 나그네 일뿐이야!"

도로변의 한 나무그늘아래서 야외수업 중인 치파타 초등학교(Chipata Basic School)의 총 22명의한 학급 학생들과 미모의 교사, 아메스타(Amesta).
그녀의 미모와 매력에 흠뻑 취한 학생들의 냉혹한 나그네무시에 나는 조용히 사라질뿐이다.

한 참 도로를 달리다가 도로변의 한 나무그늘아래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 자세히 보니 '한 미모'의 여성 앞에 적지 않은 수의 어린이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모여 앉아 있다. 나를 미소로 환영하고 있는 그 여성에게 물으니, 그들은 치파타 초등학교(Chipata Basic School)의 한 학급학생과 교사로 야외수업 중이라고. 총 22명의 학생들은 미모의 교사, 아메스타(Amesta)의 매력에 완전히 푹 빠져 그들에게 희귀하기 짝이 없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요지부동으로 그녀만을 바라보며 앉아 있고, 내가 아메스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뒤돌아 앉기까지 하며 나를 무시한다.
"미녀에게 약한 것은 노소가 따로 없다니께! 쬐그만 놈들이 밝히기는…"
그녀는 전과목뿐만 아니라 성서까지 가르치고 있어 교사에 목사까지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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