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개에게 물어뜯긴 가방
에디터 : 이호선

내 조국이 있는 동쪽에서 2008년의 새로운 태양이 몇 겹의 무거운 구름을 치받으며 떠오른다.

드디어 포르투갈의 땅 끝 마을 '카보 다 로카(Cabo da Roca)'까지의 유럽횡단이 시작된다. 유럽의 시작을 알린 것은 바로 도로에서부터이다. 여유 있는 갓길과 함께 완벽한 포장도로가 시작된다.
하지만 날씨는 정말 음울하고 나를 슬프게 한다. 남부유럽은 겨울에 비가 많이 온다. 마치 장맛비처럼 예측불허의 변덕스런 날씨가 계속된다. 차가운 겨울비는 외로운 자전거국제무숙자(無宿者)를 정말로 슬프고 처절하게 만든다.

마을은 바다를 따라 이어지고 도로 오른쪽엔 오직 끝없는 산이다. 나는 첫날부터 그리스의 고속도로를 달린다. 자전거는 고속도로를 달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미친 척 해본다.

나는 카발라(Kavalar) 근교의 고속도로변에 있는 낙석방지용 콘크리트 구조물 옆에서 2008년의 새해를 맞는다. 날씨는 잔뜩 흐리고 쌀쌀해서 참으로 우울한 새해아침이다. 그나마 흐리멍덩한 새해의 태양을 보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가 필요했다.

그리스의 국경을 넘어 첫 번째의 큰 도시인 테사롱니키(Thessaloniki)까지는 약 300km정도다. 그리스의 지도를 보니 그리스는 좁고 길어서 길이 많지 않다. 왼쪽으로는 끝없이 에게해(海)가 그리고, 도로의 오른쪽은 끝없는 산악지대이다. 중간 중간 표지판과 함께 유적지가 나타나지만 오랜 역사로, 무너져 내려 제대로 된 것은 안 보인다.


두꺼운 구름아래, 하루 종일 차가운 에게해(海)의 바람이 나의 얼굴을 찌른다.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 해안을 따라 단조로운 마을이 계속된다. 한결같이 주황색 지붕에 흰색 벽의 집들이 계속될 뿐이다.
내가 그 동안 너무 기대를 한 탓인가, 아테네(Athina)조차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아테네시(市)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를 향해 계단과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질질 끌다시피 올라가 보니 공사용 구조물로 온통 둘러 싸여있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저기에 오르면 아테네 시가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텐데 조금은 아쉽다.
입구 옆의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뜨거운 물이 나온다. 이게 웬 횡재냐! 면도와 세수를 하고 양말도 빨고 밖에 나와 벤치에 앉으니 햇볕이 따사롭다. 얼마 만에 보는 해인가?! 터키에서부터 그리스의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오는 동안 결코 누려보지 못했던 햇볕이다.

파트라(Patra)를 향하는 길에, 나는 드디어 임자를 만난다. BMW 모터사이클을 탄 순찰경찰이 나의 앞을 막는다. 젊고 핸섬한 경찰이다. 뻔한 질문 몇 가지를-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그리고 왜 가는지-묻더니 이내 ‘잘 가라, 그리고 행운을 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육중한 1200CC BMW 모터사이클로 앞바퀴를 들고, 뒷바퀴로만 달리는 묘기를 보이며 사라진다. 거참, 싱거운 친구네!

어둠 속의 아티나(Athina)에 도착해 고급 호텔이 몰려있는 조그만 광장의 나무 밑에서 하룻밤을 때운다. 밤새도록 공원의 곳곳엔 야릇한 놈들이 어슬렁거려 거의 날 잠을 자야 했다.
아침에, 아테네 시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를 오르려고 계단과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등에 지다시피 올라갔으나, 그것은 보수공사용 구조물로 온통 둘러 싸여있었다.(이 건물은 바로 밑에 있는 폐쇄된 건물임)


파트라(Patra)를 50여km 남겨놓은 지점에서 이번엔 순찰차가 나의 앞을 가로막는다. 가슴에 훈장까지 달고 고위 간부로 보이는, 나이도 지긋한 경관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의 표정은 잔뜩 찌푸린 하늘만큼이나 고약하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아주 신경질적이다.
"‘200유로의 벌금"을 강조하며 빨리 이 길에서 사라지란다. 나는 다음 출구(exit)에서 빠져 나와 국도를 달린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코리안, 코리안! 멈춰라!" 마이크 소리와 함께 내 앞을 가로막는 순찰차는 다름 아닌 방금 전의 그 경관이다.
나는 자전거로 국도를 달리는 것은 위법이 아니다 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격앙된 어조로 나에게 소리친다.
"어쨌든, 이 길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야!!".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나의 합법을 외친다. 그는 동양인, 혹은 한국인에 무슨 원한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내, 알 수 없는 그리스말을 허공에 정신없이 토해낸다.(분명 그것은 욕설이리라.)
갑자기, 그는 나무에 기대어 세어놓은 내 자전거를 박살을 내려는 듯 그의 오른발을 번쩍 쳐든다. 완벽한 태권도의 내려찍기 자세다.
'x x x!' 나도 모르게 한국의 욕이 나의 입을 꿰져 나온다.
"차라리 내가 한 대 맞는 것이 낫지, 자전거는 절대 안 된다!"
힘차게 허공을 가르며 내리찍던 그의 시퍼런 날의 도끼는 갑자기 힘을 잃고 솜방망이가 되어 오들오들 떨고 있던 가련한 나의 자전거를 밀듯이 스친다.
신참 경찰인 듯한 젊은 운전병은 물끄러미, 그리고 초연하게 상관의 미쳐 날뜀을 관조하고 있다.

어제 밤, 내리던 차가운 겨울비는 순식간에 눈보라로 바뀌며 나를 처참하게 만든다. 염화칼슘 저장용 대형 구조물 아래에서 텐트를 쳤으나, 거의 동사 직전까지,.......
날 밤을 샌 후, 차디찬 바람을 뚫고 쥐 죽은 듯 조용한 마을 안을 뒤진 끝에, 유일하게 문이 열려있는 식당 'Το ΠΕΡΑΣΜΑ'(해독 불가). 뜨거운 커피와 푸짐한 조반을 먹고 계산을 하려하니 단지 1유로! 내가 새해 제1호 손님이라며 무조건 1유로만 받는다고 한다.
(1월1일은 영업을 안 했고 오늘 2일, 처음으로 문을 연 것이다.) 나는, 마치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 괴성을 질렀다.


결국 나는 동네 앞을 지나는 지방도로를 달린다. 아무 생각 없이 지방도로를 달리다 사납게 짖어대며 달려드는 3마리의 개들에 의해 기겁을 한다.
유럽엔 똥개가 없다. 하나같이 족보가 있는 개들로 덩치가 모두 크고 아주 사나운 개들이다. 거의 모두가 불독, 도베르만, 테리어, 롯트 와일러, 시베리언 라이카 등등. 고속도로 주변엔 모두 철책이 처져있어 개들이 도로에 나올 수 없으나 지방도로에는 철책이 없다.
고개도 안 돌리고 눈만 굴리며 내 무릎근력의 한계에 도전하며 죽기 살기로 달린다. 두 마리는 결국 나를 포기했으나 한 마리는 100m이상을 좆아 오더니, 드디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며 최후의, 그리고 필살의 한방을 날린다.
결국 자전거 뒤에 매여 있던 아주 질긴 자전거용 가방의 작은 주머니가 물려 뜯겼다. 10여cm 앞에는 나의 다리종아리가 있다.

나는 그저 나의 다리의 무사함에 감사와 안도의 숨을 쉰다. 개들은 주인에겐 정말 충직하고 용감한 동물임에 틀림없으나 집 없이 떠도는 가련한 나그네에겐 그야말로, 인정사정 없는 잔인한 악마이다.

아티나(Athina)에서 서쪽의 항구 파트라(Patra)를 향해 달리는 길은 정말 추웠다. 하늘은 연일 지독한 심통을 부렸고,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게 하는 바다에서는 계속 칼바람이,......
주택가이지만, 주민들 모두는 2중으로 된 창문과 현관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비록 길은 좁고 오밀조밀하지만 그리스 마을은 참 아담하고 예쁘다. 도로변에는 다양한 모습의 교회들이 눈에 띄는데, 정말 예쁘다.(비록 한결같이 흰색계통의 벽과 주황색 지붕이지만) 도로위에 기아, 현대, 그리고 대림오토바이까지 보인다.
도로변을 따라 귤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길가에는 떨어진 귤들이 낙엽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아주 차가워 보인다.


2007년의 마지막 날, 12월31일이다. 나는, 테사롱니키(Thessaloniki)를 향해 달리던 중, '에게해'의 깊은 바다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올해의 마지막 석양을 오래 오래 기억하려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몸을 얼어 붙는 차가운 날씨에, 계속되는 잔인한 바닷바람의 횡포에 맞서기위해, 나는 바람막이가 필요하다. 도로변에 있는 강력한, 낙석방지용 콘크리트 벽을 방패삼고 앉아 2007년 최후의 만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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