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에게도 손님 대접을 하는 게 안동 양반 아닌지요?
에디터 : 박규동

여행에서는 매사에 선택의 여지가 좁아진다.
가리고 골라야 할 사정이 점점 좁아져서 자존심마저 저당이 잡힌다. 드디어는 모든 게 궁한대로 통하는 새로운 가치가 형성된다.
땀으로 찌든 몸을 며칠씩 씻을 수 없는 것은 스스로와 타협해야 하는 단순한 상황이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야 하고(이게 가장 힘든 일이다), 물과 음식을 타박하지 않고 먹어야 한다. 풍수지리에 못 마땅한 자리에 텐트를 치거나, 구질구질하게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야 한다.
특히 국내에서의 자전거여행은 더 조심스럽다. 자전거여행 문화가 성숙하지 못하여 생긴 오해로 자전거에 대하여 배타적인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사정은 더 어렵다.
그 중에서도 자전거캠핑여행은 더 어렵다. 의식주를 모두 길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싸움을 해야 하고, 더러는 타협을 한다. 거만해야 할 때도 있고, 아양을 떨거나 기만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거나 돈으로 사야할 때도 있다. 잘 못하는 잔머리도 잽싸게 굴려야 하고 임기웅변이 능해야 한다. 모든 수단을 통하게 해야하는 세상이다. 자전거 페달을 힘들여 밟는 것이 제일 쉽다고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 월영교



아침나절에 와룡에서 안동댐에 이르렀다.
월영교 앞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나그네님이 자전거를 지키겠다고 하여 아내와 나, 인디고뱅크님과 하비님 넷이서 월영교를 걸었다. 나무로 만든 다리는 제법 길었다. 가운데에 월영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낙동강이 발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댐에는 물이 말라있었다. 영서지방에는 장마기간에도 강수량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댐에 저장해 두었던 물을 쓰면서 갈수기를 보낸 것이다.

낮 12시에 자작나무님과 바람개비님이 온다고 한 날이다.
안동에서 상주까지 함께 낙동강을 여행할 것이다.
버스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기침이 심하던 인디고뱅크님이 병원에 다녀왔다. 더 악화되지 말아야할텐 데 걱정이다.
안동버스정류장에서 두 사람을 반갑게 만났다. 일행은 일곱으로 늘어났다.
안동역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안동간고등어가 맛있었다. 내가 어릴 적에 수도 없이 먹었던 요리다. 동해에서 잡은 고등어를 안동까지 운반해 오자면 며칠이 걸리던 시절에 소금으로 절인 고등어자반은 안동사람들에겐 상식이었다.
인디고뱅크님이 고등어를 구워 먹자면 석쇠가 있어야 한다고 미리 말했던 그 자반을 우리는 식당에서 먹었다.

펑크를 수리하고 뒤 따르는 무리


갈수기에는 강 안에 강이 흐른다. 그러다 비가 오면 넘쳐난다.

남자 넷에 여자 셋이다.
불근늑대와 하비, 바람개비님이 여자요, 흰늑대와 나그네, 인디고뱅크, 자작나무님이 남자다.
나그네님은 묵묵히 후미를 맡았다. 그림자같이 움직이는 사람이 나그네님이다. 소리 소문 없이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길안내를 위해 앞에서 달리면 어느새 나그네님은 일행의 전체를 파악하는 후미에 서서 달렸다. 그 믿음이 일행의 전체 분위기를 짜임새 있게 한다. 60대가 앞, 뒤에서 관록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풍산까지 오는 도중에 인디고뱅크님의 자전거가 두 번 타이어 펑크가 났다.
실펑크라 때운 것 같은 데도 얼마 가다보면 또 바람이 빠지고 했다. 타이어를 헤집어 가시를 찾아 보았지만 워낙 작은  게 숨어 있어서 찾지를 못했다. 새 튜브를 갈아 끼우고 하면서 가다서다를 반복하였다.
날은 몹씨 더웠다. 짜증이 날만도 한데 인디고뱅크님은 여유와 유머로 잘도 넘긴다. ㅎㅎㅎ

안교리 예안이씨종가를 지날 무렵에 소나기를 만났다.
열대성 스콜같았다.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 다시 916도로를 타고 가다가 하회마을로 가는 작은 도로를 따라 좌회전을 하는데 새로운 소나기가 쏟아졌다. 부리나케 옆에 있던 작은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이 워낙 좁아서 일곱 명이 들어 서기도 부족하였다. 비는 예사롭지 않았다. 천둥번개가 동반됀 국지성 호우였다. 앉은 김에 쉬어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나이든 노인 부부 주인께 부탁하여 막걸리를 마셨다. 자전거와 트레일러 위로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며 마시는 막걸리는 묘하게 어울렸다. 더구나 자작나무님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신 김치 조각을 입으로 빨면서 청승스럽게 마시는 막걸리의 이 맛을 누가 알리오!

40분에 후에 비는 멎고 다시 길이 열렸다.
가늘어진 빗줄기를 타고 가게를 나서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산허리에서는 비온 후에 생기는 구름이 피어올랐다.
병산서원으로 가는 마지막 4km는 도로가 포장이 되지 않았다. 길도 좁아서 차가 서로 비켜갈 자리를 잡으려면 눈치를 보아야 하는 옛길이다. 아내 불근늑대의 트레일러를 대신 끌어주는 바람개비님이 너무 재미있다고 한다. 이 길은 이렇게 남아 있어야 제멋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병산서원 들어가는 문

만대루 아래에서

풍산에서 낙동강은 다섯 구비를 돌아 나간다.
네번 째 구비에서 강은 병산에 가로막혀 또 다른 구비를 만들었다. 강 건너 병산 절벽을 마주보고 모래밭을 지나 서당을 지었다. 西厓 柳成龍이 옛 서당을 이 곳으로 옮겨 후학을 도모한 것이다.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아온 류성룡의 참뜻이 서원 곳곳에 베겨있었다. 시원한 강을 내려다 보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넓은 마루집 만대루의 건축미는 일품이었다.
비에 젖은 배롱나무꽃 백일홍의 자태도 뭉클하여 나는 아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병산서원을 나와서 하회마을로 향했다.
저녁 다섯 시가 넘었는데도 많은 인파가 마을을 찾아왔다. 오늘 저녁에 부용대 앞에서 낙동강 위에 수상무대를 차리고 "부용지애"라는 뮤지컬을 한다는 것이다. 하회마을이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된 기념이라 했다. 여행에서 얻는 덤이 이런 것이다. 인파를 따라 자전거를 탄 채 우리 일곱은 하회마을 깊숙히 들어갔다. 골목을 돌면서 집 안을 기웃거리며 시간여행을 했다. 강과 마을은 옛것인데 인걸은 간데 없었다.

병산서원 배롱나무꽃 백일홍은 유명하다.


하회마을

가늘어지긴 하였어도 비는 계속 내렸다.
거대한 수상무대가 꾸며진 곳 남쪽의 솔밭에서 저녁을 해 먹었다. 공원용 벤치가 여러 개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어두워지면서 뮤지컬은 시작되었다. 부용대 절벽을 이용하여 조명과 특수효과로 살린 무대는 대단하였다. 아내와 몇 명은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고 나와 나그네님은 텐트 칠 궁리를 하였다.
뮤지컬이 끝나고 인파가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우리는 재빨리 텐트를 지었다.

잠을 자려고 하는데 길건너 민박집 주인인 40대 남자가 와서 여기에 텐트를 치면 안 된다고 했다.
"왜 안 되는가요?"
"원래 자전거도 들어오면 안 되는데....."
"밤이 늦어서 옮겨가기도 어려우니 내일 아침에 일찍 철수할게요."
"저, 모래사장에 가서 치시든지요."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주민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도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면 손님 대접을 하는 게 안동 양반의 예법이 아닌지요?"
"........."
"예전에는 여기서 야영을 하게 하였다고 하였다면 필요에 따라 다른 곳에라도 야영장을 마련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건 안동시에다 말씀하시고요. 우리는......"

하회마을에서 소나기 사이로 나타난 석양은 특별한 선물이었다.


뮤지컬 '뷰용지애' 공연 장면

사정을 하고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청소년을 비롯하여 천막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더구나 외국인들이 천막여행을 오게 된다면 우리는 그들을 맞이할 야영장이 부족하다. 하회마을이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면 더더구나 야영장 시설은 필수가 아닌가?!
오늘까지 낙동강을 따라 오면서 한번도 야영장을 만나지 못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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