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의 중심 샤잉샨드에 도착하다.
에디터 : 박규동

2011년 07월 11일   月    맑음
39.7km 운행     야영지 45도15'37,00+109도54'23.63 

08:30 - 29도C. 18:00  - 35도C.

지난 밤을 묵었던 자리

역 마을 아침 풍경이다.

나도 수학을 인정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철이 없었던 중학생 시절이었다. 아무리 계산을 하여도 수학으로 그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일들이 내 주변에 산재해 있었다. 625전쟁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나누고 뺄 수 없듯이 이승만 정권의 부족한 정치를 몰아 세우며 동맹휴학 봉기에 앞장 섰던 나도 인생을 따지고 곱할 수가 없었던 시절이다.
고비는 수학으로 인정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서정으로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다.
사막의 장엄함에는 도대체 가치를 메길 수가 없다. 몽골고비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는 인간성이라는 단어로 방정식할 수 없는 숭고한 그 무엇이 있었다. 바람은 슈퍼콤퓨터 수 만 대로 계산을 하여도 분석하지 못하는 힘과 감정을 지녔다. 바람은 신처럼 섭리하고 왕처럼 군림하였다.
오! 석양은 어떠한가?!
분광기로 수학할 수 있는 빛의 파장을 몇 %나 골라낼 수 있을까?
??????






길 끝에 기차가 가로 지르고 있다.


오전 내내 오르막을 올랐다.
그런 느낌이다. 황야에서는 오르고 내려가는 자전거 길이 그저 느낌으로 일뿐이다. 지형지물이 없다보니 가늠할 길이 없다. 다리에 걸리는 무거움의 느낌으로 오르막이거나 내리막을 느낄 뿐이다.
볕은 뜨거워졌으나 바람은 잔잔했다. 물을 마셔대는 량으로 보아 땀을 많이 흘린 것 같으나 몸으로는 느낌이 없다. 사막의 건조가 땀을 곧 바로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땀은 없어지고 옷깃에 소금끼 가득한 서태만 남는다.

점심 때에 기차역이 있는 마을을 만났다.
아내의 트레일러 바퀴 하나가 삐죽이 제 자리에서 빠져나온 것을 발견하고 그 것을 수리 하기 위해 멈춘 것이 다행스럽게도 델구르가 있는 역 관사촌이었다. 마치맞게도 관사촌의 울타리가 철로의 레일로 만들어져 있어서 그 위에 구부러진 볼트를 올려 놓고 망치로 펴기에 좋았다.
그 모습을 본 40대의 남자가 찾아와 인사를 하더니 도아 주겠다고 서둔다. 운이 좋았다. QR레버가 부러지거나 못 쓰게 됐다면 엄청 고생을 했을 그런 상황이었다. 고장은 수리 되었지만 아직도 길게 남은 사막의 길에서는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트레일러의 각 바퀴를 점검하고 조금 더 꽉 물리게 조임나사를 조정하였다. 큰 사고를 피하려면 쉴 때마다 점검을 해야겠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와 하고 몰려들었다.
델구르에 물과 콜라를 사 갔고 나오다가 마딱뜨린 것이다. 11학년이라는 여학생 에르덴 치맥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었다. 델구르 앞에 있는 그늘이 드는 턱에 앉아서 쉬려고 하는데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테차와 빵이 내 앞에 놓여 있었고 손짓 공용어로 많이 먹으라고 하였다.
치맥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한글교본을 갖고 있었다. 내 왼쪽에 바싹 앉더니 한글 공부를 하잔다. 한글교본은 문장을 한국어와 몽골어로 서로 번역해 놓은 것이었다. 한국을 조선이라고 표기한 것을 보니 북한에서 제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영어도 학교에서 배웠다며 조금 했다.
잠깐이지만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의 대접은 더 뜨거워졌다.
치맥이 자기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니 그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치맥이 아내 불근늑대를 향해 공용어로 의미를 전한다.
"양을 잡아서 끓이고 있으니 쉬었다가 양고기 파티를 하고 가세요!" 그 것도 색다른 경험이라 우리는 순순히 응하기로 했다.






옆에 앉은 사람이 나를 향해 자기와 나이가 같을 거라고 내 나이를 물었다.
내가 67을 땅에 써 보이자 그는 뒤로 자빠졌다. 그는 54세였다.


양고기찜은 익어가고 치맥과 나의 한글수업은 계속되었다.
양을 잡아서 껍질을 벗기고 몸통은 토막을 내고 내장도 갈무리를 하여 솥에 넣고 찌는 몽골 전통 요리이다. 마당 한 가운데에 장작불을 피우고 둥근 돌을 불 속에 넣어 달군다. 물은 쓰지 않는다. 고기에서 녹아내리는 기름이 찜질 효과를 내는 것 같다.
고기가 익어갈 때쯤 달구워진 돌을 고기가 있는 솥 안에 넣고 두껑을 무거운 것으로 눌러둔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끓인다. 고기는 익고 솥바닥에는 한 사발 쯤 되는 국물이 남는다.
그 국물이 최고라며 제일 먼저 나에게 권한다. 몇 모금을 마셨다. 사막의 향기가 맛으로 승화되어 입맛으로 스며든다.
마을 사람들이 여럿 둘러 앉아 저마다 손에 작은 손칼을 들고 고기를 썰어서 먹는다. 맛이 기가 막힌다. 내가 여태 먹은 것 중에 최고의 요리였다.
두 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그들과 보냈다. 아이들에게 볼펜을 치맥에게는 화장품을 선물하였다.
떠날 때에는 지평선으로 사라질 때까지 치맥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속이 든든하니 길도 쉬웠다.
뜨거운 볕도 감당할만 하였다. 며칠 전부터 신경을 쓰이게하던 종아리 햇볕 화상도 화상꺼즈로 감은 덕에 이제는 좋아졌다. 그저 자전거 페달을 밟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볕이 가져다 주는 또 하나의 혜택은 태양광충전기이다. 이번에 가져온 볼텍(Voltaic) 충전기는 디자인도 좋지만 효율성도 좋았다. 고비의 볕이 강하기도 하지만 충전의 량이 대단히 만족스럽다. 준비한 외장바테리는 3개였다. 볼텍에 포함된 것과 희진아빠님이 만들어 주신 것 그리고 또 하나. 모두 하루면 만충전이 되었다.
사용하는 기기는 GPS, MP3 그리고 휴대전화기 2대이다. GPS는 로그 기록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전원공급이 필요했다. 휴대전화기도 전력소모가 한국에서보다 많은 것 같았다. MP3는 야영할 때 매일 저녁으로 듣는 유일한 문화 구독이었다. 기기를 응용하는 데 충분한 전력을 볼텍 충전기로부터 공급 받았다.
장거리 야외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지금까지 시판된 어떤 상품보다 휴대성, 편의성, 호환성이 좋다. 무엇보다도 디자인이 마음이 든다. 볕은 내 낮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볕가리개가 필요하니까!

걷기로 했다.
저녁 6시부터다. 길에 모래가 깔려있는 양이 두껍기도 하지만 왠지 걷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아내도 그러자고 하여 두 시간을 걸었다. 사막에서 자전거를 끌며 걷는 맛이란! 참 행복하였다.
안단테, 안단테!

우리는 걸었다. 안단테 칸타빌레의 행복 속으로.....

7시에 캠프했다.
이렇게 넓은 마당을 우리 둘만 쓴다고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든다.
석양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저녁밥을 지으며 MP3에서 음악을 구독한다. 해가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광경은 경이롭다. 멍하니 바라본다.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미학적 태도이다.
아내의 얼굴에도 석양이 물든다. 붉게 물든다. 오늘 밤은 그냥 잘 수 없겠다.

바람에 자전거가 쓰러지는 것을 막으려고 브레이크를 벨크로테잎으로 잡아놓고
고정하는 로프도 각각 강화했다.







2011년 07월 12일   火   맑음
41.5 km 운행   사잉샨드 도착, 샨드프라자 호텔 숙박

자동차 페달과 자전거 페달은 발로 밟아 속도를 조정 한다는 게 같다.
자동차 페달은 발끝으로 가볍게 밟았다 놓았다 하면서 자동차의 속도를 달랜다. 자전거 페달은 크랭크와 연결 돼 있고 그 크랭크는 다시 앞 톱니바퀴를 돌린다. 자전거의 앞 톱니바퀴는 체인으로 연결 된 뒤 톱니바퀴를 돌리고 뒤 톱니바퀴는 자전거의 뒷바퀴를 구르게 하여 자전거를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자전거를 탄 사람은 자전거의 엔진에 해당 된다.
자동차 엔진과 달리 자전거 엔진은 사람의 밥힘으로 간다. 밥을 잘 먹어야 하는데 더위로 입맛을 잃은 것이다. 이제는 씹어서 삼키는 음식조차도 억지로 먹어야 할만큼 입맛을 잃었다. 낮에는 밥을 물에 말아서 훌훌 마시 듯 먹었다. 그리고 된장을 찍어 먹었다. 풋고추가 그립다!
더위 탓이리라.


아버지와 아들의 말타기

용케 만난 검은 길 아스팔트, 포장공사 중이었다.

어쩌다가 검은 길을 만났다.
새로 만들고 있는 길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너무 뜻밖이어서 거짓말 같았다. 가까이 접근해 보니 최종포장을 앞 두고 있는 콜탈이 찐득찐득한 길이었다. 반갑기도 하였지만 이 길을 이용해도 될 것인가, 아니면 콜탈이 너무 끈적이면 이용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것인가 하고 잠시 망서렸다.
우선 검은 길에 걸어서 올라가 상태를 시험해 보았다. 끈적임이 그닥 심하지 않아서 우리는 일단 도로를 타기로 하였다. 무슨 횡재를 한 기분이다. 1km 쯤 갔다. 도로 한 가운데에 대형 도로포장장비가 한창 포장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멋쩍어셔 자전거에서 내려 끌며 걸었다.
열이 펄펄 나는 아스콘을 대형 덤프 트럭이 뒷걸음질 하더니 포장장비에 거꾸로 쏟고 있었다. 작업 인원은 한 20여명,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샌벤오?"를 했는데 "니하오?"하고 답이 왔다. 공사가 일시에 멈추었다. 다소 긴장도 되었다. 기술자와 인부들이 아내와 나를 에워싼다.
"울란바타르-베이징-한국!"하면서 나는 자전거 타는 시늉을 해 보였다. 베이징이란 말에 모두들 얼굴에 웃음이 인다. 아내는 내가 입고있는 져지의 등에 박힌 지도를 가르키며 손가락과 한국어로 설명을 한다.
이 져지는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의류사업을 하고 있는 둘째 아들과 며느리가 특별히 만들어 준 기념판이다. 져지의 앞에는 영어로 GOBI BIKE EXPED.이라는 여행의 목표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다시 'Gobl is only passage point'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뒤 등판에는 몽골과 중국의 지도가 그려져 있고 우리가 계획한 길이 붉은 색으로 표시 돼 있어서 설명만 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입고 있는 아내와 나도 자부심이 생길만큼 멋진 옷이다. 도로공사의 기술자와 인부들 모두들 엄지를 치켜 세우며 자기들의 일인냥 기뻐한다. 공사 중인 도로를 타고 왔다고 핀잔을 줄지 몰라 긴장을 하고 있던 차에 이런 환대를 받다니. 나도 어라둥절 하였지만 덩덜아 기분은 좋았다.
아직 자동차는 개통하지 않은 길이라 이 길을 계속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열심히 가란다. 공사장비와 차량을 피하기 위해 도로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턱진 부분을 그들이 트레일러를 들고 밀어 주면서 힘을 실어 주었다.
2km를 따끈따끈한, 그야말로 신작로를 달렸다. 그러나 약 500m마다 길을 흙더미로 막아 놓았다. 차량의 통행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한 모양이다. 좋다 말았다. 그러나 모래길을 가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흙더미가 있는 곳에서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밀면서 포장도로를 계속 갔다.

우리가 입고있는 져지의 등판에는 몽골과 중국의 지도그리고 예상 경로가 그려져 있다.

기술자와 인부들이 내가 입고 있는 져지에 그려진 지도를 보고 놀라워 한다.

따끈따끈한 새길을 달릴 수 있도록 도와준 기술자들에게 감사한다.



길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잉샨드까지는 쓰고도 물이 남을 것 같아 모처럼 양치질을 했다. 1주일만이다.

낮에 사잉샨드에 도착하였다.
바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잉샨드까지 무사히 왔다는 전갈을 하기 위해서이다. 사잉샨드는 우리가 종주하고 있는 몽골고비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남부고비를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가는 도시이다. 아내와 나는 미리 생각해 놓은 게 있었다. 사잉샨드에서는 조건없이 이틀 밤을 호텔에서 쉰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도 먹고, 무엇보다도 샤워를 해야 하는 것도 포함이다.

사잉샨드 구도시로 가는 길


사잉샨드 기차역

신도시로 넘어가는 고갯길

고개를 넘어 신도시로 들어서다.

사앙샨드는 언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도시가 나눠져 있었다.
영남과 영북으로 갈린 것인데 영북에는 기차역이 있는 구시가지이고, 영남은 호텔따위가 있는 신시가지였다. 바타의 안내로 우리는 신시가지에서 호텔을 골라 들었다. 샨드프라자호텔이다. 하루에 3만 투그릭으로 이틀을 예약하고 자전거와 짐을 3층에 있는 방으로 옮겼다.
내가 먼저 샤워를 했다. 황사 먼지가 몸에서 줄줄 흘러 내린다. 살아서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분명한 건 내가 그렇게 축복의 세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아내는 샤워를 끝내고 밀렸던 빨래를 했다.
전화기를 켰다. 한국에서 온 메시지를 읽는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이다.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낮잠을 잤다.

저녁에는 서양식당에 가서 스테이크를 썰어서 먹었다.
맥주도 한잔 했다. 자축하는 의미로 호사를 부렸다.





2011년 07월 13일   水   맑음
휴 식.    사잉샨드  샨드프라자호텔 44도53'36,14+110도08'15,02

늦잠에 낮잠까지 즐겼다.
이번 여행에서 몽골고비 구간은 어려운 길이다. 그 길의 중간에 와 있는 셈이다. 낮잠을 즐기 듯 우리는 고비를 즐기면서 여행했다. 고난과 갈증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선택사항을 비켜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몽골은 지금 나담 기간이다.
나담은 1년 중 기후가 가장 좋은 7월에 열리는 몽골 최고의 축제이다. 약 1주일 간이다. TV에서는 몽골 전통 씨름과 말달리기 등 축제의 행사를 생방송으로 보내 주고 있다. 우리의 구정 명절처럼 몽골인 모두가 들떠있다. 민속악 연주도 좋았다. 낮잠 사이 사이로 TV를 본 것이다. 몽골의 나담에서 느낀 것은 몽골인들은 아직도 씨름이나 말타기, 활쏘기 등 행동하는 사람들을 영웅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씨름을 보면서 잔꾀를 쓰는 사람을 보지 못 했다.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내는 데에는 잔꾀보다 용맹이 더 가치있는 일인 것이다.

구도시와 신도시를 나누는 언덕 위에 전시 된 전차

물파는 집 안의 탱크, 차에 실어온 물을 이 탱크에 담았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판다고 했다.


수레에 물통을 싣고와서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

골목에 버려진 소머리

오후 4시에 시내 산책을 나섰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보다 신발을 밟는 게 더 좋았다. 발바닥 가득하게 땅이 느껴졌다. 나담 기간 중이라 호텔 프론트의 여자직원도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영남 신도시 한 가운데는 언덕에 전적기념비가 서 있었다. 작은 수레를 끌고 물을 사러 가는 아이들도 만났다. 부러진 팔을 깁스하고서도 자전거를 타는 십대도 만났다.
아내는 과일을 먹고 싶어 했다. 포도와 바나나와 자두를 용케 구했다. 아파트도 여러 채 있었다. 이렇게 넓은 땅에 왠 아파트냐는 생각도 들었다. 골목에는 금방 잡은 듯한 소머리가 버려져 나뒹굴고 있었다. 신,구 도시를 가르는 언덕배기 위에는 전차가 대포를 남쪽으로 향한 채 박제 되어 있었다.
순례하는 것은 그 도시를 우리의 관념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그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마땅할 것이다. 걷는만큼 관념의 폭을 넓히는 공부가 되었다.
순례의 참 의미는 그런 것일게다. 보이는대로 보는것이다.




푸르공과 기사 트브진, 그는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해 주었다.

푸르공 기사에게 좋은 식당을 물었더니 차를 타고 함께 가자고 해서 그와 저녁을 함께 먹었다.

나는 몽골에 와서 가장 흥미로운 게 푸르공이었다. 푸르공은 우리의 봉고 승합차를 닮은 4륜구동 차량인데 소문으로는 사막과 광야에서 최고라고 했다. 50년은 돼 보이는 차이지만 고치고 고쳐서 지금도 잘 굴러 다닌다. 도로가 미비한 몽골에서는 이만한 차가 없겠다 싶다. 약 200만 원쯤 하는 모양이다. 기사 트브진은 여행객을 위해 많은 사람들과 동행을 했던 것 같다. 한국어도 한두 마디 했다.

관공서나 공원, 학교 마당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사막에 적응하는 수종인 것 같았다. 나무 둘레로 구덩이를 파고 물을 인공으로 공급하는 모양이다. 나무가 꽤 자란 곳도 있고 관리가 부족하여 죽은 것도 있었다. 비만 내리면 이 땅 전부가 옥토일 것인데 말이다.

묵었던 샨드프라자 호텔

*** TV에서 KBS WORLD를 볼 수 있었다. 몽골 전역에서 시청이 가능한 것 같았다. 중계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는 모르겠다. 들판 게르에서도 TV를 원형 위성 안테나로 시청하는 것을 보았다.
*** 나담은 몽골 최고의 축제이다. 7월11일부터 17일까지 열린다고 했다. 1년 중에 꽃이 가장 많이 피는 계절이기도 하다. 나담 기간에는 말타기, 씨름, 활쏘기 등의 전통 무예를 다투는 행사도 있다. 민속악을 연주하고 가족끼리 함께 보내기도 하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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