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사막에서 길을 잃다.
에디터 : 박규동

2011년 07월 09일  土   맑은 날
43.2 km 운행   야영지 45도48'44,31+109도17'46,77   아이락2km전방

지루하고 심심하다.
그렇다고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다. 길이 울퉁불퉁한데다 모래가 덮힌 두께를 파악하고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넘어지는 낭패를 당하기 때문이다. 볕은 점점 뜨거워지고 바람도 더워진다. 그렇다고 몸을 식힐만큼 쉴 수 있는 그늘도 없다.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캠프 철수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일찌기 길을 나서는 유조차량

빨래판 길이 왜 생겼을까? 시속 5km로 가야하는 길이다.


삼각대를 이용하여 찍은 우리 사진

길을 묻는다.

심심한 끝에 처음으로 카메라 삼각대를 세우고 우리를 사진해 본다.
처음으로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 사진을 찍었다. 그렇다고 심심풀이가 다 된 것도 아니다. 멀리 트럭이 한 대 지나가지만 먼지만 날릴뿐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다는 게 참기 어렵다. 트럭이 달린 흔적으로 만들어진 빨래판길에 관심을 가져본다.
빨래판의 높은 데와 다음까지의 간격이 얼마나 될까? 20cm일까? 아니 어떤 건 50cm도 될 것같다. 빨래판 간격의 공식은 트럭의 속도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바퀴의 지름에 의한 것일까? 빨래판길에서 적정속도는 얼마를 내는 게 좋을까? 1-3단으로 5km/h가 좋겠다.
그럼 이 속도로 가다가 언제 고비를 넘을 수 있겠는가?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고생을 시켰다고 집에 돌아가면 쫓겨나는 건 아닐까? 제발 즐겁고 재미있었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는 걸 안다.

지루한 끝에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반갑다. 이사를 와서 이제 막 게르를 짓고있는 장면도 보았다. 뼈대는 이미 세워져 있었고 지붕과 옆 벽을 치고 있었다. 우리기 매일 텐트를 치고 허는 것 같은 거다.
마을 어귀에서다. 한편으로 다정하게 데이트를 하고 있는 남녀를 만났다. 몽골에서 이런 장면은 처음이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이 인사법은 어저께 터득한 것인데 만나는 사람 중에 한국어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면 쉽게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못 알아들으면 다시 "샌벤오!"를 하면 된다. 그런데 기적처럼 남자가 "안녕하시요!"로 대답을 한 것이다.
한국에서 몇 년간 일을 했다는 그는 아내와 염소몰이를 하고 오는 길이라 했다. 가게 델구르가 있는 곳과 아이락까지 몇 km인지 등을 알려 주었다.

게르를 짓고 있는 모습

한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남편과 그의 아내

마유주를 들고 온 청년과 그의 여동생

나그네를 반겨 준 마을 사람들

마을 가운데로 들어서는 데 어떤 청년이 막걸리같은 걸 담은 사발을 양 손에 들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마시라고 권하는 게 아닌가! 목마르고 심심하던 차에 생각도 없이 사발을 받아서 꿀꺽꿀꺽 마셨다. 시큼텁텁하고 알콜기운이 약간 느껴졌다. 마유주 아이락이었다.
그의 여동생도 따라와 연신 웃으며 정을 나타낸다. 몽골사람들의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 못 말릴 수준이다. 인류가 지닌 영성 중에서도 최고의 수준임에 틀림이 없다. 말을 타고 온 친구를 포함해서 여러 명이 우리를 둘러싸고 공용어를 나눈다. 웃음꽃이 남발한다. 손가락 엄지가 수도 없이 나부낀다.
심심하였던 내 안에 이런 기운이 차곡차곡 저장이 된다. 고비를 넘어갈 기운 중에 이런게 꼭 필요한 것이다.

내일이면 아이락이라는 작은 도시에 닿을 것이다.
하루 치의 물과 간식을 더 구입하여 다랑차르가란 마을을 떠났다. 나그네를 맞이하여 정성을 다하고 떠날 때에는 서슴없이 보내는 게 몽골사람들의 손님접대 방식이다. 유목민들이 오랜 세월 쌓아온 이치인 것같다. 이치의 오묘함에 탄복하겠다!

게르와 바람막이 담장

위 사진에 게르에 살고 있는 아이들

낮 1시와 2시 사이에 점심을 먹는다.
김밥이나 주먹밥을 준비했다가 장아찌를 반찬으로 먹는다. 이 장아찌는 고모리 한식전문점 "물꼬방"에서 준비해 준 것이다. 활련초라는 나물을 설탕으로 발효시킨 후에 양념을 곁들여 만든 특별한 반찬이다.
마침 작은 마을을 지나는 길이었다. 바람막이로 세워둔 나무 판자 옆에 1m 넓이의 그늘이 있어서 거기서 점심을 먹고 낮잠도 잤다. 옆 집 아이들이 구경을 와서 우리 주위를 서성거렸다. 모든 게 사막의 풍경이었다.

낮잠에 중독되었다.
그래도 낮잠을 자고나면 몸이 개운하다. 그 기분으로 오후의 벌판을 달리는 것이다.
멀리 산마루에 송신중계탑이 보인다. 그 부근에 도시가 있을 것이다. 예감이 맞다면 거기는 아이락 인근일테고 우리는 그 송신탑 아래서 야영을 해야겠다. 오늘 오후에는 바람도 많이 잠잠해졌다. 다시는 바람이 불 것 같지 않았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가늠하는 흰늑대

성공이 의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나는 없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의무라는 생각이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나면 후회나 원망이 없어서 좋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때에는 성공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자전거여행은 과정이 더 중요하다.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여행의 본질이라는 생각이다. 이 여행은 아내와 나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풍경이 아니던가!
심심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작은 도시 아이락을 2km 남겨둔 산 중턱에 캠프를 차렸다.
지평선이 눈끝까지 바라 보이는 곳이다. 아이락이 눈 아래로 펼처져 있는 모습도 좋았다. 한꺼번에 100량 씩 화물칸을 달고 가던 기차가 멈추어 서서 숨고르기를 하는 기차역이 보이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길도 한 눈에 바라보였다.

캠프를 하려고 자리를 잡다.

바람이 너무 잔잔하여 오히려 천막의 바람통로를 더 열어 놓았다.
텐트를 치고 저녁밥을 해 먹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MP3에서는 조용필의 노래가 구성지게 흘러나온다. 살갑다.
참 좋은 저녁이다.

좋은 저녁은 날이 어두워지자 나쁜 저녁으로 돌변하였다.
바람이 일었다. 우리의 야영지는 바람의 속도가 더 높아지는 언덕배기다. 주체할 수 없는 바람이 천막을 흔들었다.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싶다. 지주로 세워둔 자전거가 쓰러지고 바람통로를 만들어 두었던 타프는 바람에 찢어질만큼 펄럭거린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복구를 위해 망치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 타프를 땅바닥에 닿도록 바람통로를 막았다. 쓰러졌던 자전거를 다시 세워 팩을 튼튼하게 박았다. 다시는 바람이 불지 않을 것 같았던 저녁 날씨가 이렇게 급히 변하다니 오늘은 고비의 바람에 관한 또 다른 공부를 한 셈이다.
다짐 하나,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언덕배기에 막영을 하지 않는다. 둘, 고비의 바람은 언제라도 급변할 수 있으니 긴장을 풀지 말아라!
바람은 새벽까지 몰아쳤다.

아이락에서 2~3일이면 사잉샨드에 들어갈 것이다.
거기서 샤워를 해야지!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야지. 며칠만인가?




*** 09:00 - 18도C, 10:15 - 30도C, 12:30 - 34도C, 15:40 - 36도C. 오늘의 기온.
*** 기온은 높았으나 건조한 탓에 그렇게 덥다는 느낌은 없었다. 볕을 많이 쏘이면서 칼슘 섭취가 많아 기분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2011년 07월 10일   日   맑음, 뭉게구름.
46km 운행  야영지 45도30'03,57+109도35'44,11


바람 때문에 밤새 설쳤다.
새벽부터 바람이 누그러져서 일찍 캠프를 철수하기로 했다. 피로도 풀지 못하고 머리도 멍멍한 채로 짐을 서둘러 싼 것은 아이락에 가서 아침을 사 먹고 장을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시가지에서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델구르도, 식당도 다 문이 닫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일요일이다. 11시는 돼서야 문을 연다는 것이다. 식당이야 닫혀 있으면 우리가 밥을 해 먹으면 될 것이지만 당장 물을 구해야 한다.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이락 역 앞에서

바트 오치르가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때 바트 오치르를 만났다. 문짝같은 걸 들고서 어디로 가고 있었다. "문을 연 델구르가 어디 없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한국분이세요? 나 한국어 할 수 있어요"라고 한다.
바트는 한국에서 5년 간 일을 하였었고 작년에 귀향하였다고 했다. 지금은 이 지역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한국회사에서 한국인들과 일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뭘 도와드릴까요?" 바트에게 물과 부식과 빵 등을 구해야 한다고 하니 알았다면서 가던 길을 되돌아 오더니 어디로 전화를 한다.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해서 따라 갔더니 자기 집에 있던 물 1.4리터짜리 5병을 내놓았다. 잠시 후에 바트의 친구가 차를 몰고왔다. 그 친구도 집에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물 7병을 갖고왔다. 물 값을 주려고 해도 돈도 받지를 않았다. 삽시간에 물은 해결이 되었다.
간식용 햄과 빵을 더 구하면 된다. 바트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전화를 걸어 불러낸 모양이다. 델구르가 문을 막 열고 있었다. 식품 구입은 그렇게 끝났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바트는 자신이 담근 김치가 있는데 가져가겠느냐고 물었다. 사양을 하고 길을 나서는데 바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친절했었던가 하는 의문에 점점 부끄러워졌다.

빵으로 요기를 한 다음 마을을 벗어났다.
작년에 이길을 다녀온 노마드님의 얘기로는 이 곳에서 한국인들을 만났다고 했다. 도로공사를 하러 온 LIG건설 기술자들이었다. 바트의 말로는 이곳에 한국인 교회가 있다고도 하였다.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시간이 마땅하지 않았다. 아이락은 작은 도시였다.

시가지를 벗어나 남동쪽을 향해 언덕을 올랐다.
철로의 동쪽 편으로 가고 있었다. 뒤 따르던 아내가 철로를 건너 서쪽으로 가는 트럭이 있는데 혹시 그 길이 바른 길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지도를 꺼내 보니 아이락에서부터 철로 서쪽 편으로 가는 길이 표시돼 있었다. 올랐던 언덕을 다시 내려와 철로를 건너 그 길을 따라갔다.
1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확신에 찬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나도 종종 내 확신에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30분이 더 지났지만 길은 점점 희미해졌다. 트럭들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길을 잘 못 가고 있었던 것이다.

길을 잃기 위해 길을 가다.

길을 잃고 쑥스러운 몸짓

땅 속에서 무엇인가를 캐고 있는 사람들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확인해 보았다. 우리는 계속 서쪽으로 달렸던 것이다. 사잉샨드는 남동쪽에 있다. 남동쪽으로 방향을 고쳐 잡았다. 누가 오래 전에 지났던 흔적을 하나 찾아냈다. 길로 진화하지 못 하고 바퀴자국만 남은 흔적이다. 바퀴자국에 이미 풀이 자라고 있었다. 그 길을 선택한 다음 남동쪽으로 2시간을 달렸다. 멀리 기찻길이 보였다. 건널목을 넘어 서니 안도의 마음이 나를 위로한다. 잠을 설친 탓인지 나의 길찾기가 오류를 범한 날이다.

이쯤에서 터득한 것이 있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자주 나침반을 챙겨서 볼 것. 대형트럭이 지나다니는 길을 면밀히 관찰할 것. 나침반과 대형트럭의 진로가 맞으면 그 방향으로 길을 삼아 갈 것. 철로에는 거의 30km마다 역이 있는데 역무원들을 위한 관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역에는 작으나마 델구르가 있다는 것. 물과 식량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한 경우에는 계속 철로를 따라가면 하루 거리에서 물과 식품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우리처럼 대형 짐차, 트레일러를 끌고 다니면 식량과 물을 여유있게 준비할 수 있고 그러면 사막에서도 더 자유로운 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 아래 말라빠진 풀이 자라고 있다.
짧은 여름을 만끽하기 위해 풀들은 생명의 절정을 살고 있었다. 그 풀들이 위안이 되어 우리도 즐거웠다. 작고 수줍은 허브의 꽃들은 제 삶의 기쁨을 숨기지 않고 한껏 표현하고 있었다. 고비는 사막을 사는 모든 생명체들을 위한 참다운 세상이었다. 물이 마른 참다운 세상이다.
이 참세상을 나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길을 잃었던 기억까지도!

잃어버렸던 길을 되찾고 보니 길의 방향을 가늠하는 철로가 더 없이 소중해졌다.
길을 찾아 가기 위한 방편이 나 나름으로  준비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사정에서는 철로를 길의 가늠자로 삼고 가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선 아내를 안심시킬 수 있어서 좋다. 고비여행에서 아내를 지켜내는 것은 제일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아내를 지켜내는 것보다 더 우선이 되는 것은 아내를 안심시키고 여행을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여행은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가는 호기심 덩어리이지만 그 호기심을 낭만과 해학으로 풀어내는 것은 여행자의 몫이란 걸 나는 아내에게 보여줄 것이다.
어쨌던 행운은 우리 편이 아닌가!

철로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갔다.
철로 아래에 작은 교량같은 통로를 발견하고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그늘이라 좋았다.

철로 아래 지하통로에서 점심을 먹다.


저녁나절에 작은 기차역을 발견하였다. 작은 델구르도 있었다. 물과 식량은 넉넉하지만 델구르는 만나기만 해도 그냥 배가 부르다. 델구르에 들어가 쥬스를 샀다. 잘 생긴 젊은 남자에게 이 마을에서 텐트를 치고 자고 싶은 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물론 공용어를 사용하였다. 아내는 두 손을 모아 귀 옆에 대고 잠자는 시늉을 한다. 알아들은 그 청년은 자기 집 앞에 텐트를 치라고 권한다. 이때부터 우리는 이 마을의 손님으로 존중되었다.
텐트 칠 자리를 잡았다. 모여든 청년들이 내 망치를 달라고 하더니 군데군데 박혀있던 돌멩이들을 빼낸다. 텐트의 폴에 천막의 고리를 걸고 내가 해야할 일들을 도와주었다. 바람막이로 집을 이용하였으니 오늘은 바람 걱정을 놓아도 될 것이다.
청년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기차역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여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다.



천막이 완성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젊은 부부가 우리를 저녁에 초대하였다.
게르 말고는 몽골인들의 집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다. 꽤 큰집이었는데 아마 서너 가구가 나누어 사는 모양이다. 큰 방 두 개에 입구 쪽으로 주방겸 식탁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보기에도 9개월 배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들이 건네주는 한 사발 음식을 받았다. 양고기탕에 손국수를 넣은 전통 음식인 것 같았다.
반찬은 달랑 하나, 고비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부추였다. 부추를 총총 썰어서 고추가루와 간장으로 양념을 한 것이다. 느끼한 국물에 부추를 쳐 먹으니 다소 입맛이 돌았다. 국수를 한 그릇 먹고 나서 반 사발을 더 먹었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눈치와 공용어와 미소로 대화를 나누었다. 멋진 만찬이었다. 저녁을 먹고 그의 안방에서 차를 마셨다. 동네 청년들이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왔다. 언어라는 섬세함은 없지만 공용어라는 몸짓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게 한다. 암호 같다. 구석기시대의 암호로 전자시대를 이야기 하며 고비의 밤을 뜻 깊게 보냈다.


집 안에는 화장실이 없다. 야외 화장실

마을 전경


저녁을 대접 받았다.



오늘은 길을 잃었을 때의 긴장감 때문인지 46km를 달렸다.
일찌기 출발하였었고, 낮잠도 자지 못 하고 열심히 달렸다.


여행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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