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가 날리는 고비 황야 속으로
에디터 : 박규동

2011년 07월 07일   木  흐리고 바람이 세다.    캠프 46도14'57,44+108도31'57,09
초이르를 지나 광야에 들어서다.        91.2km

A0101은 우리가 종주하고자 하는 몽골-중국 국경도시 자밍우드까지 가는 공식 도로명이다.
울란바타르에서 자밍우드까지 약 800km이다. 아직은 초이르까지만 포장이 되어 있다. 몽골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물동량을 늘려야 하는 몽골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간선이다.
울란바타르에서 남동쪽으로 곧장 이어지는 이 길은 오래 전부터 교역의 통로였다. 북경과 울란바타르 사이를 오고가는 말과 낙타로 구성된 대상의 통로였고, 19세기에는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산주의가 아시아 대륙으로 전파되는 중요한 정치적 이동로였다. 소비에트연방 시절에 놓은 철도가 이 통로의 가장 큰 교통수단이었으며 그 동안에는 이 철도를 통하여 물물과 사상이 아시아에 전달 되었던 것이다.

담장 안에 천막을 쳤던 델구르


S자로 크게 돌아가는 기칫길, 이 넓은 평원에 무슨 뜻으로 이런 철길을 만들었을까?

과속경고 표지판, 60km/h까지는 사람얼굴 그 이상은 해골이다.


우리 부부처럼 외로운 한 쌍의 두루미

자전거여행가들이 이 길을 좋아하는 것은 아직도 인공도로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출발하여 러시아를 관통하고 몽골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고전적 루트가 바로 이 길이기도 하다.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중국을 거쳐 몽골-러시아-유럽-아프리카로 떠나는 자전거여행자들이 꼭 지나야 하는 엑기스같은 길이다.

오늘도 북풍이 불었다.
밤새 잠을 설치게 하였던 개들은 어쩐 일인지 아침에는 말이 없다. 나에게 충고를 하거나 항의를 하는 개도 없었고 안타까워하는 녀석도 없었다. 다만 코를 땅에 박고 모른 척 할뿐이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얼나나 왔을까 지나가던 승용차가 우리 앞에 멈췄다. "센밴오?" 하면서 다가온다. 네 명이다. 30~40대로 보이는 데 손에 병을 들었다.
몽골에서 가장 고급스럽다는 징기스칸 보드카이다. 뭐라고 몽골어는 왁자지껄하다. 나도 웃으면서 한국어로 대꾸한다. 아내는 우습다고 웃음을 연신 짓는다. 한 사내가 술을 아내에게 권한다.
아내가 손사레를 치지만 그들의 친절을 이길 수 없다. 나도 한 모금을 마셨다. 한 순간 이 술에 미약이라도 섞여 있는 건 아닐가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그들의 호방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의심을 지워버린다.
"울란바타르-자망우드-베이징!" 하면서 나는 우리의 깃발을 들어 보이며 설명을 한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엄지를 세워 보인다. 무료함이 싹 달아나는 순간들이다. 자연경관이 아무리 좋다한들 이렇게 사람을 만나 노닥거리는 운치만큼이나 하겠는가 말이다.

사람들이 좋다!
노동자이든, 유목민이든, 여자든, 노인이든, 아이들이든 사막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좋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몽골인들을 좋아 하게 되었다. 물론 울라바타르에서 처음 만난 바타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소득 수준이 몽골 2천 불이고 한국 2만 불이라는 격차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 경제학자들이 싸질러데는 지수라는 게 얼마나 하잘 것 없는지 몽골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게 된다. 호방하고 지순하다.
나도 이 여행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나를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얼머나 노력하면 그들을 닮을 수 있을까?

초이르 표지판 앞에서

보드카를 건네고 간 친구들

주유소, 1톤트럭 보다 작은 건물 벽을 바람막이로 점심을 먹었다.

우리의 점심, 몽골빵에 치즈와 햄, 요거트 그리고 물

휴대용으로 간편하게 개발된 태양광충전기는 고비에서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람은 나의 꿈까지도 부풀게 했다.

초이르를 북쪽 멀리서 본 풍경


멀리 초이르가 보인다.
바람은 황사먼지를 일으키며 초이르를 감싼다. 오늘은 장을 봐야한다. 물, 부식, 햄, 쥬스, 콜라까지. 길에서 비켜나 초이르 시내로 진입하였다. 마을 한 가운데에 물 웅덩이가 있다. 야트막한 물 웅덩이에도 파도가 황토빛으로 출렁인다. 델구르에서 물건을 산다. 초이르는 겉으로 보이는 건 작은 마을이지만 주변에 산재한 많은 게르의 중심이 되는 시장인 모양이다.
장이 제법 크다. 시장을 두리번 거리는데 어느 가게의 아가씨가 "안녕하세요?"라고 한다. 얼른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본다. 수줍어하는 태에 반해 그녀의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한다. 그녀가 할 수있는 말은 단 한 마디 "안녕하세요!"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초이르 시내에 고인 물 웅덩이

델구르 앞에 모인 아이들

델구르 앞에 눕혀져 있는 우리 자전거 앞에 사람들이 와 몰렸다.
호기심 많은 아이가 기어의 숫자를 센다. 9단이라며 손가락으로 아홉을 가르킨다. 아내는 한국어로 설명을 한다. 아이들에게 볼펜도 나누어 준다.
허머 짚차를 몰고온 사내는 영어를 했다.
"어디서 왔소?"
"한국에서 왔다오."
"어디로 가오?"
"자망우드로 해서 베이징-티엔진-인천-서울 그리고 우리 집으로 간다오."
"바람이 심한데 고생이 많소."
"관심 가져 주어서 고맙소!"
"즐거운 여정이 되길요!"
"잘 있어요!"
그는 오지여행 안내인이었다.



바람을 따라서 황사 먼지는 날아가고 모래와 작은 돌 알갱이만 표면을 덮고 있다.

사막에는 강이 없다. 낮은 곳에는 빗물이 모여서 웅덩이가 생긴다.

수 십 갈래의 흔적이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길은 없다.


초이르를 나와서 작은 언덕을 넘고 내리막을 달리는 데 갑자기 길이 없어졌다.
막다른 길의 끝에는 오른쪽을 향하는 화살표 표지판만 덩그렇다. 미래로부터 과거로 길을 옮겨 간 것이다. 사막으로 채워진 고비의 시간으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들어갔다. 길들여졌던 인공도로가 없어졌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처럼 우리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였다. 헛웃음이 났다!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사막은 모래로 꽉 채워진 건 아니었다. 모래와 자갈과 바위와 먼지와 진흙과...... 지질학적인 모든 종류의 표본들이 적당히 섞여 있었다. 다만 비가 내리지 않아서 사막은 매 말라 있는 것이다. 매 마른 황야 위로 이리저리 자동차가 흘러 다녔던 흔적들이 풀을 헤치고 흩어져 있었다. 숱하게 흩어져 있는 흔적들 중에서 골라내어 우리는 그 중 한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잘 골라낼 수 있을까?

미친 바람 때문에 천막을 치는데 1시간이 걸렸다.
바람을 방어하지 못 하면 우리의 여행은 지옥이 될 것이다. 어렵사리 캠프를 세우고나니 부러울 게 없을만큼 만족스럽다. 텐트를 고정시키는 팩 4종류 18개는 나름으로 역할을 다 해 주었다.
몽골의 평원을 일명 스텝(steppe)이라 하는데 지질학적 다양성 때문에도 여러 종류의 팩이 필요한 것이다. 모래가 많이 섞인 땅에는 넓은 모양의 팩을, 단단한 지대에서는 주물로 만든 철제 팩을, 땅의 단단함이 보통인 곳에서는 알미늄 팩을 사용해서 강풍으로부터 천막을 고정 시킬 수 있었다.
지주를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자전거와 트레일러를 이용한 골격시스템은 어지간한 폴보다도 더 강하게 천막을 지탱해 주었다.

자전거와 트레일러로 양쪽에 지주를 하고 가운데 텐트를 친다.
천막을 덮고 팩 18개를 박으면 완벽한 방풍과 그늘을 얻을 수 있다.


2륜 트레일러는 나의 예상처럼 잘 따라왔다.
고비자전거원정을 떠나면서 무척 고민하였던 게 짐을 어떻게 운반하느냐 하는 대목이었다. 나는 단연코 그간 줄곧 사용하던 2륜 트레일러를 갖고 가겠다고 하였지만 주변에서는 이런저런 경우를 들어가며 반대를 하였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 하나는 아직까지 고비사막을 2륜 트레일러로 넘어온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전거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페니어나 아니면 1륜 트레일러가 사막에는 좋을 것이라는 관념이었다. 나는 15년 전에 호주대륙횡단을 자전거로 하면서 그때 아들 창민이와 2륜 트레일러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성공적이었던 경험이 있기에 학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2륜 트레일러의 고비종단 경험이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여러 경로로 자료를 구하고 있었다.
2륜 트레일러를 고비에 가져오기를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황야에 접어든 첫날의 소감이다.

황야를 자전거로 달린다는 흥분에 지쳐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바람이 불었다.


*** 물 1.4리터 1병에 400투그릭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그 값은 변동이 없었다.
*** 햄 종류가 다양하였다. 취향을 고려한다면 하나씩 사서 먹어볼 일이다. 값이 비쌀수록 질이 좋다고 보면 된다.
*** 초이르까지는 하루 안에 물을 살 수 있는 델구르가 있었다.
*** 극소수이긴 하여도 영어를 하는 사람보다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 7월의 날씨는 우리나라의 늦여름과 초가을이 섞여있는 느낌이다. 낮에는 여름, 밤에는 가을. 다만 건조하기 때문에 더위를 느끼지 못 한다.



2011년 07월 08일   土   흐린 후 맑아짐.  
34.2km운행.         야영지 46도00'35,62+108도48'29,37

벌판의 비포장도로에서는 하루에 30km를 가기로 하였다.
우선 나아갈 길을 가늠하고 찾을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흔적으로 생긴 길도 갈래가 수없이 늘어나서 어느 갈래로 들어서야지만 바른 방향으로 효과적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게 당면문제다. 그 다음은 짐을 가볍게 하고 가려면 물 구입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는 일이다. 길을 잘못 들거나 물이 부족하지만 않는다면 크게 어려울 건 없다는 게 오늘의 판단이다.
하루에 30km씩 주행을 하자는데는 여러 정보를 분석한 결과 60대의 우리 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트레일러에 쌓인 황사먼지



남쪽으로 내려올 수록 기온은 점점 올라가고 대신 바람은 약간 누그러지는 것 같다.
구름도 얇아지고 햇볕은 뜨거워졌다. 돌풍이 불면 황사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피어오르며 시야를 흐리게 한다. 대형트럭이 지나갈 때에도 마찬가지다. 볕의 뜨거움, 황사, 바람은 이미 각오를 하고 왔기 때문에 그다지 두려움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두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은 사람들의 헤코지였었다. 그러나 그런 기우는 이미 날려 버린지 오래다. 몽골인에 대한 신뢰, 아니면 인류에 대한 믿음이 쌩겨났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 고민이지만 그것도 좋은 방법을 곧 찾아낼 것이다. 길 찾기는 나의 주특기이다.

황사의 먼지는 돌풍이 아니면 거의 보이지 않을만큼 미세하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먼지는 걱정거리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자고나면 자전거의 프레임이나 트레일러의 끌대에 누렇게 끼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으적으적 씹히는 게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황사를 걱정해야 할만큼 사정이 넉넉하지 않다. 물 걱정, 길 걱정을 하다보면 먼지 걱정은 사치스러운 것이다. 이틀 후에 아이락 마을에서 식량을 보급할 생각이다.





길 걱정 중에는 이런 게 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힘이 덜 드는 코스를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꼼수다. 트럭이 지나간 바퀴자국 한 래인을 타고 가면서도 5cm 간격으로 길을 골라 본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낄 수 있기 때문에 눈, 코 뜰새 없이 코스 선택에 골몰하는 것이다. 만사에 우선이 길 골라잡기이다.

11시즈음에 게르를 발견하였다.
길에서 약 500m 거리에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말이라도 걸어 보려고 게르를 방문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게르를 찾아오는 사람을 보고서 아이들이 게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에 어른들이 게르 밖으로 나오더니 우리를 반겼다. 70세는 되어 보이는 남자가 우리를 정중하게 게르 안으로 초청하였다. 손자들이 넷, 아들, 며느리, 딸, 부인이 있었다. 침상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더니 얼른 사발에 무언가를 따라서 온다. 요거트이다.
목마른 처지에 나도 아내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릇을 내려놓자마자 또 다시 한 사발을 따른다. 이어서 요거트를 말린 치즈같은 걸 내놓았다. 요기가 든든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우리의 자전거를 타 보고 낄낄거리며 좋아 한다. 주인 아줌마와 아내 불근늑대는 각자 자기의 언어로 대화를 주고 받는다. 공용어 사이 사이에 웃음 소리가 끼어 있다.
아내는 준비해 간 볼펜과 화장품을 게르 가족들에게 선물 한다. 얼굴에 밀크로션을 바르더니 두 살짜리 여자 아이가 말갛게 웃는다.
고비여행의 진수가 이런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아내도 붉게 웃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게르에서는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어디론가 물을 싣고 가는 트럭. 우리도 이런 물탱크 하나 달고 다녔으면 했다.

길이 많다는 것은 길이 없다는 것이나 다를바 없다.
길에서도 연신 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속 시원하게 말해 줄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지도도 무용지물이다. GPS의 좌표는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직 나침반만이 우리의 짐작을 확인해 줄 뿐이다. 짐작이 용기가 되려면 나침반이라는 확인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번에 갖고온 나침반은 박언진이 선물해 준 것이다. 최신형이다. 야간에도 쓸 수 있도록 조명장치도 돼 있다.
사실, 우리가 가고있는 이 고비는 박언진의 세상이다. 박언진이 꿈꾸고 그가 만들어서 세상에 내 보이고 싶은 바로 그런 세상, 지고지순한 세상이 고비인 것이다. 말하자면 박언진이 그의 세계로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길 찾기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다. 내일 안으로 쉽고 확실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물과 쥬스를 주고 간 사람들

지질학자와 만남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양산으로 얼굴만 가리고 땅에는 폼메트를 깔았다. 잠은 보약이다. 몸이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떨어진 감이 있다. 낮잠은 그런 신체적인 부족함과 긴장감을 풀어 주는 약효가 있다.
낮잠을 한참 자고 있는데 차가 멈추어 섰다. 아내와 남자 둘이 무슨 말인지 주고 받는다. 아내의 공용어 실력이 좋아진 것이다. 잠에서 깬 나에게 그들 50대 남자들은 나를 향해 엄지를 두 개씩이나 한꺼번 세워 보인다. 남쪽 어딘가에 자기네 사는 집이 있다면서 주소도 적어 주고 쥬스와 물 한 병을 주고 갔다. 꼭 징기스칸처럼 생긴 사람이다.

한 참을 가다가 길에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멀리서 시추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공사장에서 한 젊은이가 성큼성큼 걸어서 우리를 만나러 온 것이다. 영어를 했다. 영어라도 시원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반가웠다.
"나는 지질학자인데 저 곳에서 석탄광 개발을 위해 시추시공을 한다"고 자기 소개를 했다. 나도 우리의 여정을 소개하고 반갑다고 인사했다. 그는 다른 소식을 전해 주었다. 어제 저쪽 길로 자전거여행자가 한 사람 북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호주인 단독여행이란다.
몽골에 호주인들이 자주 찾아온다는 정보를 어디서 본 것같다. 사실 호주에 오지가 더 많은 것을 나는 안다.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손이 따뜻했다.


끊어진 체인을 수리하다.

사막에서는 길에 모래가 쌓인다.
모래가 쌓인다기 보다 황토성분은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알갱이로 남은 모래가 쌓여있는 셈이다. 작게는 두께 1~2cm에서 많게는 20cm이상 쌓인다. 오늘 경험으로 자전거바퀴가 묻힐만큼 5cm가 넘게 쌓이면 자전거 운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10km/h의 속도로 달리다가 7cm가량의 모래가 쌓인 길에 들어섰다. 속도가 갑자기 떨어지길레 변속을 했다. 투둑하고 체인이 끊어졌다. 속도가 갑자기 낮아지기 때문에 기어를 제대로 바꿀 타이밍이 찾지 못 한 것이다.
어쨌던 모래길에서는 기어변속을 하지 말아야겠다. 아내에개도 그 사실을 명심케 했다. 그 다음부터는 모래길이 나타나면 내가 앞에서 "모래길이다!" 하고 외친다. 그러면 기어변속 없이 힘껏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깊지 않은 모래길은 자전거를 탄 그대로 통과할 수 있다.
얼마나 더 갔을까? 내 뒷 타이어가 작은 가시로 펑크가 났다. 여행을 떠난 후 첫 펑크다.

오지 여행용 특수차량




좋은 일이 생겨서 갑자기 바빠졌다.
무선전화를 중계하는 송신탑 아래를 통과하게 된 것이다. 전화기를 켰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큰 손자 종찬이의 문자는 나를 흥분시켰다. "목표를 성공하시고 대단한 할아버지가 되어 오세요!"
나도 여러 사람들에게 문자편지를 보냈다.
사람을 만나거나, 게르를 방문하거나, 문자를 받거나,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손짓을 하거나....... 이런 일들이 우리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철도역이 멀리 보이는 기칫길 옆에 캠프를 차렸다.
기차의 기관사가 기적을 울리며 반가운 척을 한다. 보일락말락하는 얼굴에 미소를 담어 보낸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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