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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박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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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주분교의 교무실, 학생이 여섯 명 뿐이라는 말이 자꾸 맴돈다. |
"학생이 여섯 명 뿐"이라는 말이 자꾸만 자전거 뒤를 따라 맴돈다.
농주분교를 나서서 여수로 가는 길이 가볍지 않았다.
여수에 닿으면 첫날부터 오늘까지 여행을 함께 했던 나그네님이 떠나고 대신에 오이쨈님이 교대하여 여수반도를 2박3일간 함께 다닐 것이다. 그 간에 숱한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나그네님은 조용한 가운데 맡은 역할을 다 해 주었다. 나서거나 주장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오랜 경험으로 우리 팀 전체에 나그네로 스며들어 준 것이다. 어떨 땐 나그네님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고 지날 때도 있었다. 매우 든든한 파트너가 떠나가는 날이다. 나그네님은 며칠 후에 몽골로 10일 간 자전거여행을 떠날 참이다. 몽골여행 즐겁게 다녀오시길 빌어요!
한낮에 여수 버스터미널에 닿았다.
오이쨈님을 반갑게 만났다. 온라인에서만 만나다가 직접 남나는 것은 처음이다. 첫 만남을 여행에서 맞은 것이다. 함께 점심을 먹고 나그네님을 배웅한 다음 오이쨈님이 합류한 우리 팀은 향일암으로 향해 여수를 떠났다.
동해안에 7번도로가 있다면 남해안에는 77번도로가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의 반이 넘게 77번도로이다. 반도와 섬과 바다와 다리와 연육교를 연결하면서 77번 도로는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구불구불 나 있다.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많이 볼 수 있는 길이 77번이다. 여수에서 돌산대교를 건너는 것도 77도로이다. 그 길을 따라 죽포까지 온 다음 향일암으로 가기 위해 삼거리에서 왼쪽 지방도를 탔다. 도중에 내 트레일러가 펑크 났다.
아픈 몸에 기력을 회복한 대율 마을회관 |
윤구가 이틀만에 건강이 회복되었다.
반면에 아내와 나는 오늘부터 배탈이 났고 기력을 잃었다. 페달링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음식조차 먹을 수 없었다. 5~6백m의 작은 오르막도 힘에 겨웠다. 드디어 향일암을 3km 남겨놓고 대율이라는 동네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오이쨈님과 윤구가 서둘러 섭외한 끝에 마을회관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2층으로 된 회관 건물은 지은지가 얼마되지 않은 새 건물이었다. 아래, 위층이 모두 문이 열려 있었다. 아래층을 쓰기로 하였다 커다란 방이 두 개 있었고 가운데는 거실에 주방까지 차려져 있어서 지치고 아픈 몸에 모든 게 고마웠다. 한 쪽 방에는 맛사지 의자와 돌침대가 있었다. 오이쨈님이 돌침대를 뜨겁게해서 나를 두러눕게 해 주었다. 저녁을 굶은채 아침까지 정신을 잃고 잤다.
다음날, 9월 10일.
계획대로라면 쉬는 날이다.
윤구와 오이쨈님의 간호로 아내와 나는 외롭지 않았다. 자전거여행 중에 병이 났는데도 외롭지 않다는 것은 황홀한 축복이다.
오이쨈님과 윤구가 자전거로 향일암에 다녀오겠다고 하여 떠나보내고 나서 또 잠을 잤다. 향일암에서 돌아온 윤구가 디카의 액정 화면을 보여주면서 향일암이 그만이라고 자랑을 하는 통에 아내와 나도 걸어서 향일암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향일암 입구 |
태양은 인류의 유일 신이다.
향일암이 그런 인류의 꿈을 꾸고 있었다. 누구나 바라던 그 꿈을 꾸는 꿈자리에 향일암이 앉아 있었다.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그 해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충만은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수평선에서 해가 뜨고 수평선으로 해가 가라앉는 모습을 하루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하고 나는 얼마나 원했었던가!
향일암을 오르는 몇 개 되지도 않은 계단을 오르면서 아내와 나는 몇 번을 쉬었다. 옆에서 같은 길을 가는 아주머니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해야지, 다리 떨릴 때 하는기 아닌기라!"
우리도 늙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아내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떠난 여행치고는 무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두 무릎과 양 팔꿈치 그리고 이마를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땅에 닿게 하는 오체투지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오지 않았는가!
"비나이다. 거듭 비나이다. 아내의 다음 생을 기쁘게 해 주십시오!"
향일암에 다녀오니 오이쨈님이 아내와 나의 기력을 올려야겠다고 토종닭백숙을 시켜 놓았다.
나는 국물만 조금 먹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오이쨈님은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돌산섬을 둘러보러 나갔다. 낮에는 마을 노인회장님이 오셔서 아래층은 노인들이 놀러오는 곳이니 윗층으로 옮겨달라고 하여 우리는 윗층으로 이사를 했다. 대율마을 이장님과 노인회장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11일, 화요일.
대율마을을 떠나 광양을 향해 페달을 저었다.
오전에는 비를 맞았다. 비를 맞으며 돌산도의 고갯길을 넘고, 넘었다. 돌산교를 건너 팔각정에서 비를 피해 멈추었다. 아내는 회복이 어느정도 된 듯하나 나는 아지도 거북한 상태라는 걸 알았다. 점심을 먹으러 가서도 나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태풍 "모라꼿"이 한반도의 중부를 가로 지른다는 소식을 TV를 통해 보았다. 여수에서 쉬기로 하였다. 가까운 찜질방을 찾았다. 속이 차가운 것 같아 자꾸만 뜨거운 데를 찾는다. 찜질방까지 우리를 바래다 준 오이쨈님은 서울로 가신다고 버스터미널을 향해 떠났다. 3일 간 아픈 모습만 보여줄 수 밖에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비를 맞으며 3일 내내 아내 불근늑대의 트레일러까지 끌면서 우리를 위로해 준 오이쨈님에 대한 고마움을 오래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3일간 아픈 모습만 보다 비를 맞으며 가신 오이쨈님 |
잠은 아무리 자도 고팠다.
찜질방 한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도 그것이 한 없이 달큰했다.
비에 젖은 옷을 세탁도 못하는 곳이 찜질방의 단점이다. 자전거여행자들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비용을 줄이려는 자전거여행자들에게 찜질방은 훌륭한 대안이 되고 있다. 텐트 생활 며칠에 하룻밤 몸을 씻고 떼를 벗기는 곳이니 얼마나 고마운 곳인지!
윤구가 찜질방 출입구 직원에게 사정하여 인터넷을 하게 되었다. 가볍게 여수를 지나고 있다고 내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내일은 남해에서 산장지기님과 마찌님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윤구와 의논하여 광양만을 배를 타고 넘기로 하였다.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건너가는 길을 뱃길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배는 뜰 수 없다고 하였다. 태풍 모라꼿이 아직 꼬리힘을 쓰고 있다고 하였다. 윤구가 인터넷으로 뱃길을 찾아본 끝에 여수-남해를 오가는 정기여객선의 선장님 전화 번호를 용케 알아냈다. 어느 여행자 블로그에서 사진을 보고 배경에 찍힌 선장님 번호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선장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내일 아침에 다시 통화를 하잔다. 잘하면 사흘만에 여수반도를 벗어날 수 있겠다.
찜질방 아랫층 부페식당에서 저녁과 아침을 먹었다. 주인 아줌마가 윤구룰 좋게 봐 주어서 우리가 따로 주문한 간장게장 요리 값을 받지 안았다. 요즘처럼 어른 공경이 흉한 시절에 부모님 모시고 여행하는 젊은이가 있다니 얼마나 보기에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여수항 |
12일, 수요일. 비 오다 흐리다 비 온 날.
아침에 선장과 통화를 했더니 아직도 풍랑이 가라앉지 않았다고 한다. 오후에 보잔다. 배는 아침 8시와 낮 3시에 두 번 있었다.
낮 배가 떴다. 승객은 달랑 우리 세 명이다. 안개가 심했고 바람은 보통이었다. 남해군 서상항까지는 50분이 소요 됐다. 광양만 가득 대형 화물선박이 떠 있었다. 광양제철소로 가는 배인지 아니면 태풍 모라꼿을 피해 숨어 있는 배들인지 모르겠다.
네 시에 서상에 닿았다.
배에서 내리니 또 다시 비가 내렸다. 남해까지 두어 시간 비를 맞으며 달렸다.
남해읍 해양초등학교에서 직원의 양해를 구하고 마당에 텐트를 쳤다. 며칠 간 밀린 빨래도 했다. 어두워질 무렵 산장지기님과 마찌님이 버스를 타고 남해에 도착하였다.
산장지기님이 사 온 삼겹살에 소맥을 비벼 마셨다. 내일부터는 꽃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리의 꽃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