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점 혜진의 힘겨운 하루
에디터 : 최용석

1월 10일  아그라(Agra) - 돌푸르(Dolpur) (67km)

7시 기상. 어제 밤에 사 놓은 카레소스 닭과 식은 밥으로 어느 때 보다 든든한 아침식사를 했다. 오늘은 모레나(Morena)까지 100km이상 달려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서 출발하려고 했지만, 내 자전거 뒷 타이어의 펑크 확인. 어제 밤에 자전거 점검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말썽이다. 결국 9시가 되어서야 출발한다.

구조팀 성민이와 막내 정환이가 펑크 때우기로 항상 수고해준다.

오늘부터 NH3 도로를 달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악한 인프라 상황이 인도의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고들 한다. 도로 인프라 역시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대표 주자. 때문에 우리는 항상 도로 상태가 어떤지 주시하게 된다. 우리가 만나는 길의 상태에 따라서 우리의 하루가 변한다.
다행히도 NH3 도로 역시 very good! 오히려 NH2 도로가 넓고, 잘 정돈되어 있는 반면에 주변환경으로 인해 생기는 강력한 스모그와 수많은 차들 때문에 다소 위험하고 재미도 없었는데 비해서, NH3 도로에 들어서자 더 이상 나의 시야를 방해하는 스모그는 보이지 않고, 대신에 향긋한 꽃 내음과 함께 지천에 깔려있는 노란 유채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상대적으로 교통량도 줄어서 한적한 시골 도로를 연상케 한다. 이제야 자전거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사방에 유채꽃들은 내 눈을 즐겁게 해주고, 코를 향기롭게 해준다. 아그라까지 오는 동안은 일교차가 심해서 아침저녁으로 추위 때문에 고생했는데 오늘은 따뜻한 햇살이 추위마저 잊게 해준다.
새로운 도로에 들어선 우리를 날씨까지 도와주는 것인가. 자전거 타기에 최적 환경 조성 완료!
이제는 신나는 페달링만이 남았는가.... 라고 잠시 행복한 기대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내부의 적이...

오늘같이 좋은 날, 혜진이가 마법에 걸렸다.
홍일점 혜진이,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외로운 고통을 감당하기에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출발 전에 오늘 몸이 안 좋을 예정이라는 것을, 예정대로라면 오늘이 그!날이라는 것을.. 나에게 귀띔해 주었지만 현재 시제가 아니어서 정상적으로 일정을 강행했던 것.
10시가 조금 넘어서 쉬는 시간에 혜진이가 울기 시작한다.
'허걱!'
순간 당황.
'많이 아팠구나..'
나는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없을 이 고통.....
'음.... 혜진이가 여자는 여자였구나.'
사실 이런 일이라도 없으면 이 자식은 여지없이 남자.
진실이 잊혀질 때쯤, 자신이 여자임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이제부터 혜진이가 여자임을 인정하겠노라'


아픈 혜진이를 지나가는 차에 태워서 보내야 하는지(물론 힌디를 잘하는 성민이와 함께.), 일정을 바꿔 근접한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야 할지 고민 중..
혜진이를 오늘의 목적지까지 먼저 보내서 쉴 시간을 주고, 다른 대원들은 원래 일정에 맞춰서 주행을 마무리 할 것인지, 아니면 모두가 일정을 연기할 것인지의 문제다.
잠시 동안 고민해 보지만,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이번 인도 만리행 제 1의 목표는 "모두가 무사히 완주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간단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또한 가장 어렵기도 한 일. 모든 대원들이 전 구간을 낙오자 없이 함께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섯 명이 하나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가며 하나가 되는 순간.
그 순간 우리 팀 제 1의 목표는, 가능하리라!

혜진이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주고, 오늘의 목적지를 가장 근접 도시인 돌푸르(Dolpur)로 변경한다. 우리는 예정에 없던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자전거도 점검하고, 사진도 찍고, 간식도 먹으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여유로운 한때가 이곳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볼거리가 되었다.
어느 순간 우리 주위로 3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대열의 앞은 아이들, 뒤에는 어른들. 키 작은 아이들이 내부에 원을 그리고, 키가 큰 어른들이 외부에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
'이런, 질서 있는 사람들!'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어서, 사실 신기하지도 않다. 자연스럽게 이들과 대화하고 장난도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곳 아이들은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도 가까이 오지는 않는다. 다소 경계하고 있는 느낌이다. 도시아이들과는 다른 순박함이 묻어난다. 이들에게 외국인을 접하는 일이 일상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자리를 잡은 김에 이곳에서 점심식사까지 하기로 한다. 메뉴는 라면. 신속하게 재료 공수 작전 돌입. 주변 민가에서 냄비를 빌리려고 했지만 세수대야 같은 것 만을 구할 수 있었다. 물을 떠와서 '메기'라고 불리는 인도의 라면과 한국에서 준비해 온 신라면 스프, 길거리 쪼면(중국식 볶음면)가게에서 고추와 양파, 계란 그리고 양념이 안 된 생면까지 구입, 마지막으로 길거리에서 불을 쬐고 있던 할아버지들께 부탁해서 조리 장소까지 완비.
먼저 물을 끓이고, 메기의 면을 넣고 신라면 스프와 고추, 양파, 계란을 넣으니 이것이 한국인의 맛. 인도판 신라면 완성. 혜진이도 통증이 다소 가라 앉은 듯 라면을 맛있게 먹는다.


인도판 신라면으로 점심 식사! 아픈 혜진이가 제일 신난 듯

바로 이어지는 메뉴는 쪼면의 생면과 고추장과의 어우러짐. 내친김에 비상식량으로 고이 모셔둔 참치까지 함께 비빈다. 재미와 맛이 어우러진 최고의 점심시간이었다. 혜진이 덕분에 간만에 만찬을 즐긴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한 뒤에 돌푸르(Dolpur)로 출발. 사방의 유채꽃이 너무 아름답다. 향긋한 꽃 내음과 한적한 도로, 친절한 인도인들까지.. 혜진이는 지금도 힘들게 달리고 있겠지만 나는 너무너무 행복하다.
'혜진아 미안하다. 억울하면 어서 빨리 마법에서 풀려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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