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사막, 손목뼈가 부러진 것 같다.
에디터 : 박규동

2011년 07월 16일   土   맑음
18km 운행.     민박집 44도26'39,99+111도05'27,28

고비사막 자전거여행을 떠난지 보름이 넘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 간다. 특히 소갈증이 심해졌다. 내가 당뇨병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이건 심하다는 생각이다. 소변이 1시간마다 마렵다. 물론 물도 많이 마실 수밖에 없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준비한 것 중에 하나가 몸에 영양분을 비축하는 일이었다. 기름진 음식을 꾸준히 섭취하여 몸에 지방을 쌓아 두는 것인데 그 지방마저 몸에서 다 빠져나간 것 같다.
안장에 닿는 엉덩이 부분의 근육도 보통 때보다 일찍 지치는 기색이다. 오후가 되면 안장 닿은 부분이 아파온다. 안장 탓으로 보기엔 내 근육이 지친 것이다. 그걸 회복하기 위해서 일어서서 페달을 밟는다. 에너지 소비가 더 늘어난다.
피부에 고였던 지방이 빠지면서 손으로 잡으면 얇은 가죽이 잡힌다. 식단의 단조로움도 한몫하는 것이다. 입맛이 떨어진 상태에서 별미를 먹을 수 없으니 영양 공급보다 에너지 소비가 더 큰 것이다. 체중이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오아시스에 물을 길러온 낙타


요즈음은 밤마다 온돌찜질을 한다.
볕이 뜨거워지면서 대지가 그 볕에 달궈진 것이다. 달궈진 땅 위에 텐트를 치고 메트리스를 깔아도 땅바닥의 열기가 몸으로 뜨겁게 전해진다. 해가 지고나면 기온은 다소 내려가지만 자리가 덥다보니 꼭 찜질을 하는 기분이다, 아내는 좋아한다.

하룻밤 묵은 오아시스의 게르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에르덴으로 달렸다.
에르덴은 18km 동쪽에 있다. 계곡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것이다. 오아시스를 벗어나자마자 풍경은 다시 고비사막이 된다.  오늘따라 아침 볕이 더 따갑다. 멀리 아지랑이가 인다. 아지랑이는 풍광을 프리즘하여 신기루를 만든다. 에르덴이 에덴동산처럼 가물가물 보인다. 태초의 대지가 저랬던가?


오아시스의 게르 가족들과 기념 사진

물이 없어 목이 마를 때에는 이 식물을 씹어서 즙을 빨아마시고
건데기는 뱉어버리라고 게르의 주인이 일러 주었다.


신기루처럼 나타난 에르덴

에르덴 2km 전방, 무슨 표지판이 보인다.

점심 때에 에르덴에 도착하였다.
에르덴은 동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방이다. 군인 장교가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영어로 식당과 숙소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장교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우리를 유도했다. 에르덴은 군소재지이지만 아주 작은 도시이다. 식당까지 데려다 준 장교는 식당 주인에게 뭐라고 하고는 헤어졌다. 아마 숙소도 알아봐 주라고 부탁한 모양이다.
몽골만두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 주인의 가족으로 보이는 젊은 엄마가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그녀는 한국어 노래를 한 소절 부르면서 노래방 기기에서 번호를 찾아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곡이었다. 노래방기기에는 우리 노래도 여러 곡이 수록 되어 있었다. 문화도 수준을 맞추기 위해 흐르는 모양이다.

에르덴 마을

처음으로 기마군인을 보았다. 몽골의 기마군대는 세계 최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묵은 민박집

점심을 먹고나니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전화를 걸어서 우리의 민박을 잡아 주었다.
퀘퀘하고 어림도 없는 방이었다. 화장실은 동네 한복판에 있는 재래식을 써야하고, 세면을 위해 물 한 통을 갖다 주었다. 오래된 침대에는 가난한 나그네가 스쳐간 흔적이 첩첩이 쌓여 있었다.
1인 당 1만5천 투그릭에 2명이니까 3만 투그릭을 달라하기에 "너무 하지 않느냐, 1인 당 1만 투그릭에 2만 투그릭으로 하자."고 아내가 공용어를 들이댔다. 그랬더니 민박 아줌마는 씩 웃으면서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침낭을 꺼내 덥고 낮잠을 잤다. 피곤했다.

낮잠을 자고 네 시에 일어났다.
4박5일 분량의 식량과 물을 구해야 한다. 가까운 델구르에 들렸다. 1.4리터 물통이 9개 밖에 없었다. 우리가 필요한 식량은 물 1.4리터X20 통, 쌀 5kg, 햄 2 kg, 빵과 비스킷 약간, 콜라 2리터 2병, 과일쥬스 1.5리터 3병, 김치 등이다. 델구르 세 군데를 들려서 식량을 모두 구입할 수 있었다.
오늘 구입한 물과 식량만 하여도 약 45kg이다. 남아 있던 물 4병과 장비 등을 합치면.....?
자밍우드까지는 120km가 남았다. 4일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이 짐과 식량이 필요한 것이다. 최선을 다 하리라!

앞으로 사흘 간이 최대 고비가 될 것이다.
고비의 고비인 것이다. 지금까지 순탄하게 온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 그러나 앞으로 사흘은 운을 기대할 수 없다. 60대 부부에게는 모험의 길이다. 자밍우드까지 최단거리로 가자면 철로에서 벗어나야 하고 마을이나 델구르는 아예 없을 것이다. 더위도 최고조로 높은 지역이다.
고비라고 하여도 어쨌든 준비한만큼 안전하고 여유있는 여행이 될 것이라 믿는다. 식량을 충분히 구입하는 것으로 오늘의 준비는 끝났다.







우리를 구경하려고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볼펜도 나눠주고 함께 웃으며 장난도 쳤다. 자전거를 타고 온 아이들과는 자전거 달리기 시합도 했다. 실속없이 깔깔대고 웃었다. 영혼이 헹구어지는 날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이 세상이 더 평화롭기를 기도했다.
 그런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야할텐데!

식당에서 저녁도 사 먹었다.
마을 북쪽에 있는 아트막한 바위 산을 아내와 올랐다. 마을 풍경이 다 내려다 보였다. 집과 게르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으로 석양이 짙게 비췄다. 내 어릴 적 고향이 생각났다. 초가지붕을 맞대고 모여 있었던 고향 옹천의 저녁노을이 그리웠다. 아이들은 저마다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거나, 농구를 하는 아이들에 숨바꼭질을 하는 꼬마들까지...... 사이로 발가벗고 고샅을 뛰어 놀던 내 어린 모습이 포개졌다.
사막에 와 있다는 생각은 까마득했다.





2011년 07월 17일   日   맑음
22.5 km 운행.      야영지 44도13'47,58+111도05'11,95

오늘은 아내를 만난지 꼬박 44년째 되는 날이다.
1967년 7월 17일에 수원 원천유원지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 K-13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에 제헌절 휴무일에 외출을 나왔다가 원천유원지에서 운명적으로 아내를 만난 것이다. 첫눈에 반했었다. 30분만에 이 여자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으니까! 그리고 2년 후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에 아내를 만난 것이 그 첫째다. 그렇게 44년을 함께 보냈으며 지금은 고비사막 한 가운데를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아침부터 나는 아내에게 오늘 하루는 멋지게 보내자고 암시를 보냈다. 아직도 마음은 처음 만나던 그날처럼 들썩 거렸다.
오전까지는 그랬다.

아내를 만난지 44년이 되는 아침이다. 하루를 멋지게 보내고 싶었다.

고비에서는 길이 파동하고 공명된다.
길의 울림이 공명되어 또 다른 길을 만들고, 같은 성질의 길이 파동되어 그 곁에
또 다른 길이 파장으로 새겨지는 곳이 고비이다.
사막 위에 음표처럼 새겨진 이 길의 교향악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 할 것이다.

그 식당에서 몽골만두로 아침을 먹고 9시가 지나서 에르덴을 출발하였다.
아내와 첫만남을 기념하는 들뜬 날이지만 사실은 비장한 기분이었다. 나머지 120km를 무사히 돌파해야 하는 부담이 마음 한 켠에 작용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20km를 가는 것이야 하루면 너끈한 거리이지만 고비에서는 그런 만용을 부릴 게 아닌 것이다. 게다가 50kg이 넘는 짐을 실은 트레일러를 끌고 있다. 각오를 단단히 한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을 느긋하게 먹은 때문인지는 몰라도 30k가 넘는 짐을 싣고 가는 아내나 그리고 나도 평소보다 더 힘든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것도 3% 쯤 되는 오르막을 약 10km 올라가는 길이었는데도 말이다.
에르덴이 아스라하게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내리막이 나타났다. 내리막을 지나 다시 오르막이 멀리 보였다.



길은 진흙이 다져진 단단한 바닥 위에 모래가 깔려 있었다.
이런 길은 모래가 깔려있는 두께에 따라 자전거의 운행이 좌우 되는 것이다. 참 조심스럽다. 단단한 바닥 위에 덮혀있는 모래는 바퀴의 접지력을 현저히 떨어지게 하며 조향성을 순식간에 마비 시키는 함정같은 역할을 한다.
그 함정에 내가 빠진 것이다. 순식간이었다. 주의를 게으르지 않았다 것은 곧 나의 부주의가 되었다. 내리막을 2km 쯤 내려온 상태였고, 짐이 좀 무겁고 뒤에서 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긴 하였지만 나는 내 경력을 믿었다.
시속10km도 안되는 저속이었다. 앞 바퀴가 모래에 처박히며 자전거가 왼쪽으로 쓰러졌다. 신발이 크릿 바인더에서 빠지지 않았다. 찰나적으로 왼팔이 땅을 디디며 온몸의 충격을 감당했다. 윽!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발은 아직도 페달에 매여져 있었다. 의학적 쇼크상태가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 5분, 10분, 15분이 지나서야 의식이 돌았다.

왼쪽 팔은 뼈가 부러진 경험이 있었다.
5년 전이다. 스키를 타다가 넘어지며 5m를 날아가 왼쪽 어께로 떨어져 7곳 군데나 뼈가 부러지고 금이 갔던 경험이 있었다. 오늘의 쇼크도 그때만큼 강하게 느껴졌다. 불안과 걱정이 불쑥 현실이 되었다.
첫 번째 걱정은 아내를 걱정 시키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나는 아내를 지킨답시고 대장 역할을 했었는데 말이다.
그 다음은 이 여행이 여기에서 끝내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이다.
종아리에 생긴 외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깨도 괜찮았다. 손목을 움직이다 보니 통증이 심했다. 손목이 부어 올랐다. 손가락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일었다. 통증의 중심은 팔목쪽에 있었다. 순간적인 판단에 팔목뼈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았다. 통증은 온 몸을 자지러지게 했다.

무릎과 종아리의 찰과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내의 걱정이 나의 걱정이 되었다. 통증은 참고 견디는 것으로 내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아내의 걱정을 재우는 일이 걱정이다. 아쉬운데로 종아리의 외상을 소독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여기서 병원이 있을만한 가장 가까운 곳은 자밍우드인데 자전거로 나흘은 더 가야한다. 지나가는 트럭을 만나서 태워달라고 부탁해 보자는 아내의 의견을 나는 한 마디로 잘랐다. 어떤 경우에서든 내 다리로 가고 싶은 것이다. 아직도 다리는 다치지 않았으니까.
스키 사고가 났을 때에도 한 팔을 덜렁거리며 한 손으로 스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와서 병원까지 내가 운전해 갔었지 않았던가.

이 여행을 여기서 끝내지 싶지 않은 나의 욕심은 강렬했다.
이런 생각을 내 몸 구석구석으로 전하는 것은 나의 결연한 의지일 것이다. 나의 의지에 이런 판단을 전달해야 한다. 뼈가 부러지지 않은 다음에야 설령 금이 갔다고 하더래도 통증을 견디는 용기만 있다면 이 여행은 가능할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투덜거리는 사막의 도로를 달리고 나서 발생하는 팔목부상의 후유증은 나중에 걱정할 일인 것이다. 우선 살아서 이 사막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1시간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런 다음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걸었다. 걸으면서 팔목의 증상을 관찰했다. 아내를 속일 수 있을만큼 통증이 참을만 했다. 이를 물고 참고 견딘다면 가능한 통증이었다.
길이 다소 편안해지자 나는 자전거를 타 보았다. 왼손을 쓰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투덜대는 길에서 오른손만으로 자전거타기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무심코 왼손에 힘을 주었다가 속으로 수 십 번씩 비명을 질렀다. 아내 몰래.


나와 함께 트레일러를 옮겨놓고 다시 자전거를 가지러가는 아내 불근늑대


차라리 오르막 길이 더 편했다.
핸들바에 가하는 압력이 다소 누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오르막을 오르다가 모래둔덕을 만났다. 오늘은 기가 막히게도 힘든 날이다. 엎친 데 겹친격으로 고난이 이어지는 최악의 날이다.
이 모래둔덕은 바람에 날려온 작은 입자의 모래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 진 곳이다. 사막 사진에서 보던 그런 지형이다.
모래를 건너야 하는 거리는 약 70m. 아내가 자전거와 트레일러를 함께 끌고 넘어 보려고 시도를 해 보지만 어림도 없다. 더구나 아내의 트레일러에는 내가 싣고 오던 쌀과 압력솥같은 무거운 것을 옮겨 실은 상태가 아닌가.
자전거와 트레일러를 분리한 다음 아내가 자전거만을 어께에 메고 모래둔덕을 넘어갔다. 기운이 빠진 나를 대신하여 두 대의 자전거를 옮겨 둔 다음 나와 둘이서 트레일러를 옮겼다. 내가 앞에서 오른손으로 끌고 아내가 뒤에서 밀었다. 70m를 가는 데 두 번을 쉬었다. 아내는 담이 든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면서 처음으로 트레일러가 뒤에서 민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아내가 말했다. 여태껏 아내의 트레일러에는 침낭과 옷가지 등 가벼운 것들만 넣고 다녔던 것이다.


사고 후에 16km를 더 왔다.
10km의 오르막을 오른 후에 고개 꼭대기 아래 부분에 캠프를 했다. 도로를 만들기 위해 터파기를 한 곳인데 외부에는 눈에 띄지 않는 가려진 곳이다. 아내가 바빠졌다. 텐트를 세울 때에 역할이 나와 바꾸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한 손으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아내는 폴을 세우고 팩을 박고 줄을 당겨가며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스토브를 피우기 위해 조립하는 손이 어설프긴 하여도 듣고 본 게 있어서인지 아내는 잘도 해 낸다.


저녁을 먹고나니 긴장이 풀리면서 팔목의 통증이 격렬해진다.
팔목에 열이 나면서 붓기도 더 심해졌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진통제를 먹었다. 진통제를 먹고 얻은 인내로 깊은 잠에 빠졌다.



2011년 07월 18일 月 맑음
부상의 통증을 견딜 수 없어 하루 쉬기로 함.

통증도 통증이지만 몸이 자꾸만 까무러진다.
몸 안의 모든 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다. 관절마다 몸살끼가 배여서 지끈거린다. 잠이 쏟아졌다. 비몽사몽이다. 사막의 열기마저 한기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감이 인다.

자고 또 잤다.
어쨌던 쉴 수 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아쉬운데로 가져간 '미네랄 아이스'로 냉찜질을 하였다.

저녁나절에 간신히 일어나 고개 꼭대기에 있는 서낭당 어워로 갔다. 자밍우드가 딱 100km 떨어져 있는 이곳의 어워는 신통력이 있어서인지 지나가는 트럭도 차를 세우고 기사는 세 바퀴를 돌며 기도를 했다.
나도 얼마 간의 돈을 돌 틈에 끼워 넣고는 두 손을 합장하고 어워를 세 바퀴 돌았다.

"천지신명님께 간절히 비나이다! 부디 부디 이 여행이 여기서 멈추는 일이 없도록 나에게 불굴의 용기와 손에 장을 지지는 인내를 주십시오. 이 여행이 더 큰 사고없이 끝나는 날에는 나는 집으로 돌아가 손자들에게 좋은 할아버지가 되겠나이다! 아내에게도 용기를 주십시오. 두 손 모아 간절히 비나이다!"

고비늑대가 자꾸만 생각났다.
고비늑대가 다리를 자르고 덫을 탈출했듯이 나도 팔을 자르고라도 이 사막을 벗어나야지.
오로지 내 힘으로!


***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정형외과에 갔었다. X-레이를 찍어 판독한 결과 팔목 뼈에 5cm 가량 금이가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의사는 3주간 깁스를 하라고 했다. 나는 한 달이 넘도록 자전거로 달려온 인내가 억울하여 깁스를 하지 않았다.
지금(9월21일)은 팔을 70% 정도 쓸 수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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