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댄무, 비바람 속의 휴식
에디터 : 박규동

2010년 08월 10일  해평-구미-왜관-대구-화원.   66km.

간절함은 하늘을 감동시킨다.
아무리 FM을 달달 외우고 있다고 해도 그 중 사소한 것 하나라도 실행하지 못하면 야전의 극한상황에서는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물이 부족할 때에는 자신의 오줌을 마셔야할 때가 있다. 그러기 위해 나는 평소에 내 오줌을 마시는 훈련을 했었다. 실전에서 영하30도 아래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훈련으로 나는 얼음을 깨고 몸을 씻거나 머리를 감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손을 얼음물에 더 오래 담구는 실험을 하였었다. 하루에 40도가 넘는 일교차를 극복하고 생존하는 비결은 훈련을 통하여 미리 준비하는 길밖에 없다. 험난하고 외로운 길에서 날씨의 변화무쌍함이 덮치면 길을 잃기 쉽다. 안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지도를 외우고,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방향감각을 총동원하여도 모자랄 때가 있다.
준비하고 훈련을 한다고 하여도 실전에서는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MBC 촬영팀을 만나 의논하는 모습

어떤 조난에서도 나를 살아나게 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었다. 간절한 그리움이 에너지가 되어 나를 그 모진 고통으로부터 버티게 하는 것이었다. 몇 시간, 아니 면 몇 분이라도 더 버틸 수 있다는 것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탐험과 고산등반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생존한 것은 그 간절한 그리움 덕이 크다.
이번까지 여름여행을 세번 째 경험한다. 그 덕을 본 것인지 몰라도 아내와 나는 무더위와 비바람에 많이 적응되어진 것 같다. 훈련과 준비 그리고 경험은 마음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름 고통의 한계를 더 높혀준 것에 틀림이 없다.
지금, 간절히 그리운 사람은 초록마을 이웃이다.

아침밥은 공사현장의 함바집에서 하자고 너구리님이 약속을 했다.
북상 중인 태풍 댄무의 영향으로 계속 비가 내렸다. 비가 멈칫하는 사이에 텐트를 걷고 비옷차림으로 해평을 떠나 구미로 달렸다. 960세대나 되는 아파트공사 현장은 규모가 어마어마하였다. 함바집도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크고 깨끗하였다. 시장기가 더하여 정말 맛있게 아침밥을 먹었다.
하루라도 동행 라이딩을 하고 싶어하는 너구리님이다. 그러나 태풍이 올라오는 비상시기에 자리를 비울 수 없었을 것이다. 20일에 경주에서 다시 만나 자전거를 함께 타자고 하고 헤어졌다.
예를 다하고 성의를 다한 너구리님의 환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아침을 먹고나서 자작나무와 바람개비님은 버스터미널로 갔다.
이틀을 더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것이다. 늘 사람냄새가 물씬하는 자작나무님, 바람개비님 고마워!!!

촬영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구미 중앙공원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촬영팀은 세 명이었다.
우리가 진행하는 도로를 미리 알려주었다. 촬영 차량이 앞, 뒤로 오가며 촬영을 하며 가는 것이다. 가끔은 PD님이 질문을 하였고 나와 아내는 대답을 하였다. 인디고뱅크님과 하비님도 함께 촬영을 하면서 자전거 행렬은 남으로 남으로 흘러갔다.
왜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비는 간간이 내리다가 멈추길 반복한다.
자전거를 굴리는 우리보다 촬영팀이 더 애를 먹는다. 비를 이겨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카메라 렌즈를 닦는 수건도 다 젖은 것 같았다. 레인커버를 쒸우기도 하고 우비를 가리기도 하지만 만족도가 떨어지는지 PD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625전쟁 당시 격렬했던 왜관전투를 기리기 위한 전적기념관

다사를 거쳐 대구 성서산업공단을 지났다.
인디고뱅크님이 첫 직장을 얻어 부임했던 곳이 성서공단이었다고 했다. 성서공단에서 화원으로 가는 길은 좁고 어설픈 임시도로 였다. 화원에 도착하였다. 화원유원지를 찾아 낙동강가로 간 다음 고령으로 건너가는 도로의 교량 밑에 텐트를 치기로 하였다. 경치가 좋아 보이는 강가 자리였다.
텐트를 치고 밥을 짓는 장면을 카메라가 쫓아 다닌다.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바람기도 일었다. 그때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찾아왔다. 벙어리 장애를 가진 그는 우리에게 손짓 발짓을 하면서 애타게 무언가를 간절히 전하려고 했다. 한참만에 내가 알아들은 건
"비가 많이 내리면 이곳은 위험하다. 그러니 저 위쪽으로 텐트를 옮겨야 한다."라는 메시지였다.
나는 두 손을 합장하여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텐트를 100m쯤 위로 옮겼다.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하며 서둘렀다. 비가 내리면서 강물은 불어나고 있었다.
100m도 넘는 긴 전깃줄이 이어지고 야영하는 곳에 조명이 들어왔다. 조명 담당 감독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빛의 밝기를 조절하며 카메라감독과 의논을 한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며 인터뷰를 했다.
"다시 한번만 더요!"
"한번만 더요!"  
만족하지 못하는 감독의 부탁이 뒤따른다.

그러고 있는데 해평에 사시는 해평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작년에 자전거를 타고 무림리까지 찾아오셨던 50대의 정렬이 많은 해평님이다. 지금 퇴근길인데 대구 근처에 계시면 찾아 뵙겠다는 전갈이었다. 우리는 화원유원지에 야영을 했다고 하니 그리로 찾아 오겠다고 했다. 참외를 한 보퉁이 사서 옆에 끼고 평상복으로 나타나신 해평님의 구수한 모습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해평님의 손을 마주잡고 웃음을 교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경전 금강경을 한번 읽고 깨친 것보다 더 고마웠다. 그가 부처였다.


내일은 태풍이 남부지방에 상륙한다고 했다.
바람에 견디게 하려고 텐트의 모서리마다 끈을 묶고 팩을 박아 고정시켰다.
땀에 젖고 비에 젖은 몸을 씻지도 못하고 텐트에 들었다.



2010년 08월 11일  화원-화원.    태풍 댄무로 인해 운행하지 못하였다.

홍수가 낙동강을 덮쳤다.
황토빛 강물이 어제 텐트를 쳤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옮기기를 천만 번 잘한 것이다.
위험을 미리 알려준 어제의 그 사람, 내생에서는 말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손을 크게 흔들며 떠나는 인디고뱅크님

청량산에서부터 오늘까지 함께 달리며 정을 나눴던 인디고뱅크님이 돌아가는 날이다.
50대 중반이며 의류사업을 크게 했던 위트 넘치는 남자다. 자기의 생각을 상대에게 재미있게 설명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으며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고 딸에게도 자상한 아빠다. 그러면서도 에너지가 많은 해병대 출신이다. 그가 말없이 우리의 여행을 단도리하며 즐겁게 하기 위한 노력했던 것을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다.
여행에서 얻은 감기를 감추기 위해 기침도 크게 한번 제대로 못한 사람이다. 유모어가 많아서 "하비님 놀려 먹는 재미"에 우리의 웃음을 넘쳐나게 했던 사람이다.
비가 연신 내리고 있는 길을 그가 나섰다. 트레일러를 끌면서...... 대구 서부버스터미널에서 인천행 버스를 탈 참이다.
손을 흔들면서 아쉬움을 남기고 그가 떠난 것이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안에 아내를 데리고 다시 우리와 합류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바람에 휩쓸려오는 빗줄기는 텐트를 두드렸다.
쉴 때에는 잠을 자 두는 것이 좋다. 하비님도 텐트에서 나오지 않고 낮잠이다. 아내와 나도 낮잠을 잤다. 태풍이 가져다 준 선물, 휴식이 꿈처럼 달콤했다.



잠에서 깬 하비님의 재치있는 제안에 모두들 기운이 반짝한다. "비오는 날 다리 밑에서 빈대떡"이라더니 하비님이 부침개를 해 먹자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고 했다.
PD님의 차량을 이용하여 후라이팬과 부침가루며 재료를 사 왔다.
막걸리도 한 통!
막간이 이렇게 호화스러워지다니!
하비님의 해학에 우리는 귀족이 된 듯이 기뻤다.
발끝까지 투명해질만큼 우리는 웃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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